군위의 어느 초등학교에서 한자 수업을 할 사람을 찾는다는 교육청 채용 공고를 봤다. 학교로 수업을 가 본 경력이 없어서 되겠나 싶은 마음 반, 그래도 해보고 싶은 마음 반이 싸움을 시작했다.

일단 지원이라도 해보려고 양식을 내려받아 보니, 한문과 중등교사 자격증이 쓸모가 있었다. 겨우겨우 편입해서 겨우겨우 졸업하느라 치열한 시간을 보낸 것이 떠올랐다. 그 편입을 오래 후회했는데, 이렇게 쓰일 줄이야!

두 학년을 통합해 일주일에 한 번씩 한자 수업을 하기로 했다. 막상 수업에 들어가 보니 한 반 안에서도 한자에 대한 지식 격차가 컸다. 난감했지만 한자와 한자어에 대한 호감과 호기심을 갖게 하는 데 중점을 두기로 마음먹자 자신감이 생겼다.

한자와 한자어에 담긴 한자문화권의 아름다운 정신을 조금이라도 마주하도록 안내하는 것을 나의 역할로 삼고 즐겁게 수업 준비를 했다. 발도르프 학교를 선망해서 이것저것 배워두었더니, 이렇게 쓸 일이 생겼다. 어설프게나마 칠판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들려주며, 옛이야기 들려주기를 통해 한자 한 글자를 생생하게 만나도록 수업을 준비하면서 오랜만에 두근거리고 즐거웠다.

하루는 2학년 아이가 “선생님 참 열심히 준비해오시네요!”라고 말했다. 칭찬이 고마워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답했더니 아이가 ‘푸하하!’ 웃어서 나도 같이 크게 웃었다.

쌀을 소재로 한 옛이야기를 들려줄 때 한 아이가 “우리 아빠 쌀농사해요!” 하길래 나는 단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너희 아버지 정말 귀한 일 하시네!” 하고 답했다. 그 말을 내 목소리로 하니, 속 깊은 곳에서부터 기쁨이 차올랐다

나는 내 고향을 미워하고 부끄러워하며 자랐다. 고향에 남아서 혹은 돌아가서 고향을 아름답게 가꾸어야 한다는 마음을 품은 순간이 한 번도 없었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생기기도 전에, 내가 나고 자란 곳을 지긋지긋해 하는 마음을 먼저 가슴에 새겼다.

내가 유년기를 보낸 포항에는 인근 농산어촌에서 나고 자라 제철공장 노동자로 도시에 온 어른들이 많았다. 사회책이 도시화, 산업화로 요약하는 한 시대의 특성은 그들을 고향에서 뿌리째 뽑아 도시에 심어 놓았다. 낯선 곳에서 노동자로 살던 그들은 화를 자주 냈고 걸핏하면 싸웠고 술에 취해 있을 때가 잦았다. 그런 일상을 보며 자라난 나는 ‘얼른 여길 떠나야지!’ 하는 마음을 품고 자랐다.

군위에서도 그와 비슷한 열등감과 패배감이 보였다. 걱정스러웠다. 아이 셋을 데리고 이사 왔다는 이유만으로 환대 받았지만, 환대 받는 그 순간부터 “언제 이사 나가나?”라는 말을 들었다. “애들 크면 대구에 나가야 할 텐데 뭐 하려고 이사 왔나?”라고 덧붙이는 말은 인사라기보다는 추궁처럼 들렸다.

군위가 아이를 양육하기에 적절하지 않은 곳이란 공감대가 암묵적으로 형성돼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도 바꾸려고 들진 않았다. 필요한 것들을 스스로 만들어가고 부족한 부분은 관청에 제안하자고 말해보면 다들 고개를 저으며 ‘군위에서는 안 된다.’고 했다.

“군위에선 안 된다.” 그 말에서 나는 포항이 떠올랐다. 꽉 막히고 답답한, 그 익숙한 기운.

아버지를 싫어하고 고향을 벗어나는 게 절실한 꿈이었던 나를 둘러싼 그 공기.

나는 내 아이뿐 아니라 군위에서 자라는 모든 아이가 그런 공기 속에서 자라기를 바라지 않았으므로 아이들에게 그게 전부는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군위청소년상담복지센터에서 청소년 인문학 동아리를 운영할 계획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얼른 운영 계획안을 제출했다. 이때는 또 철학 전공 졸업장이 쓸모가 있었다.

생업이나 여러 활동에 한 번도 쓸모 있었던 적이 없던 이력이었는데, 이렇게 먼지를 털어낼 날이 올 줄 정말 몰랐다.

 

ⓒ내리리 영주
ⓒ내리리 영주

 

그렇게 지난봄부터 가을까지 매주 토요일에 군위에 사는 청소년 여섯 명과 만나 <소피의 세계>를 함께 읽었다. 서양 철학을 다루는 책이지만 형식이 소설이라 청소년들도 별 어려움 없이 책을 읽어나갔다. 모임은 그 자리에서 함께 책을 읽으며 마음에 와닿은 구절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진행되었다.

플라톤의 정치철학이 나오는 부분을 읽을 즈음에는 마침 지방선거 기간이라, 선거를 둘러싼 소문을 나누고 그에 대한 청소년들의 생각도 들어보았다. 선거에 관한 생각을 말해볼 기회가 없었는데, 실컷 이야기해 보니 재미있다며, 자신들의 첫 번째 선거는 언제인지 꼽아보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군위에 대해 떠오르는 것을 적어보기를 한 날에는 고향에 대한 아이들의 부정적 인식이 좀 더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특히 가까운 관계에서 오는 어려움을 토로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나는 부정적인 감정이라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다면 좋은 일이라고 여겨서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너무 부정적인 얘기만 줄곧 나오길래 물꼬를 다른 방향으로 틀어보았다. 과수원이나 논밭 농사가 있어서 볼 수 있는 풍경을 예로 드니 청소년들은 신이 난 듯 저마다 아름다운 추억을 끄집어냈다.

이렇게 꾸준히 함께 책을 읽고 지금 우리가 사는 군위에 관해 이야기하다 보면, 청소년들도 ‘나의 삶터’인 군위를 다양한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청소년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든 고향인 군위에 대한 무지갯빛 추억이 있으면 좋겠다. 그런 바람을 품고 청소년들과 모임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셀프 칭찬을 하게 된다.

‘한 발 내딛길 정말 잘했지!’

조금씩 모인 한 발은 이사 직후 나를 잠식했던 무력감을 조금씩 증발시켰다. 한껏 위축되어 좁아진 어깨를 ‘이제 좀 펴도 되나?’ 싶어진다. 어제는 내가 대견했고 오늘은 궁상맞아 보이는 변덕이 여전히 반복되지만, 이 또한 내 모습이려니 하고 손잡아 주려 한다.

오늘도 나는 인구소멸위험지역에서 살아가고 있다. 인구소멸위험이란 수식어는 이곳 사람들에게 살아갈 힘을 빼놓는 말이다. 어차피 소멸할 곳이므로 빨리 벗어나라는 메시지를 은연중에 던진다.

그러나 나는 인구소멸위험지역에서 가능성을 본다. 인구밀도가 낮다 보니 상대적으로 전염병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했다. 젊은 사람이 귀한 곳이다 보니 20년 지난 자격증으로도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국적 나이 성별 직업 등의 다양한 차이가 있는 사람들과 어울려 일하는 법을 익혔고, 이것저것 배워 온 경험과 일 벌이길 좋아하는 성향이 시너지를 발휘하여 비영리단체의 대표가 되었다.

내딛는 발걸음 속에서 내 역량을 발휘하면서 ‘남편의 따뜻한 말 한마디’에 대한 나의 집착도 스스르 사라졌다. 어느덧 세 아이도 엄마를 찾기보다 각자 알아서 하는 일이 많아졌다.

인구가 줄어드는 곳에도 사람은 산다.

각자의 이야기를 품은 사람은 인구라는 숫자로 대체될 수 없다. 인구소멸위험 1위 지역에서 나는 누구를 만나 어디에서 내 가능성을 펼칠까를 고민하며 산다.

그러니 군위는 내게 가능성 확장 1위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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