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입학생이 없다카디만은 서이나(셋이나) 델꼬 왔으니 상 조야겠네!”

마을 회관 앞에 선 통학버스를 놓칠까 봐 부랴부랴 달려가는 내 귓전에 환영 인사가 들렸다. 첫째와 둘째를 버스에 태워 보내고 셋째와 걸어서 집에 돌아가는 길에 그 목소리의 주인공과 마주했다.

얼핏 봐도 구순은 되었을 법한 어르신이었다. 마을 주민들이 모여 아침 청소를 하는 가운데, 어르신은 청소엔 관심을 두지 않은 채 귀여워 죽겠다는 눈길로 우리 집 막내만 하염없이 바라보셨다.

6년 전 봄, 경상북도 군위군 효령면 내리리로 이사 온 참이었다. 군위군은 가임기 20세에서 39세 사이 여성인구를 65세 이상 고령인구로 나누어 산출한 이른바 ‘인구소멸위험지수’가 전국에서 가장 낮은 인구소멸위험 1위 지역이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아이를 만나면 마치 생각지도 못하게 핀 꽃을 만난 듯 반가움으로 맞이했고 나는 그런 눈길이 낯설고 신선했다.

내리리에 오기 전에도 대도시에 살았던 것은 아니다. 구미시와 도로 하나를 경계로 붙어있는 칠곡군에 살았는데, 논밭과 공장과 아파트가 뒤섞여 있는 지역이었다. 그전에는 대구에서 살다가 정비 직군에서 일하는 남편이 이직하면서 외곽으로 옮겼다.

그 직장에서 남편이 자리를 잡아가는 동안, 나는 셋째를 낳았다. 운전을 할 줄 몰라 왕복 2km 정도 되는 병원이며 마트를 아이들과 걸어 다녔다. 나는 늘 걸어 다녀서 그 일이 대단치 않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살던 아파트에서 ‘애들 데리고 걸어서 마트 가는 아줌마’로 불리고 있었다.

그러다, 막내 돌 무렵 내 허리가 펴지지 않았다. 1살 4살 7살 아이들이 있었다. 내가 안 움직이면 당장 굶어야 하는데, 임신 중에 이사를 와서 아이들 밥 한 끼를 부탁할 이웃도 만들지 못한 상황이었다. 남편이 회사 일정을 조정해서 내가 한의원을 다녀오면 집안은 더 아수라장이 되어있었다. 남편과 육아를 나눈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 달에 두 번 쉬는 남편은 쉬는 날에도 밀린 잠을 자거나 개인적인 일을 하려 했다. 세 아이를 돌보는 일은 온전히 내 몫이었다.

그간은 남편이 정비 일을 하는 한엔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하고 살았다. 하지만 허리가 그렇게 되고 보니 다른 일을 하면 아이들이 아빠와 보내는 시간이 좀 늘어날까 고민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소방공무원 중에 정비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망설이는 남편에게 일단 시험이나 보라며 등을 떠밀었는데 하늘이 도왔는지 합격했다. 그렇게 우리는 남들이 도시와 좀 더 가까운 곳으로 옮겨갈 때, 좀 더 시골로 옮겨왔다.

결혼 후 여섯 번째 집이라 이사가 두렵지 않았고, 한 번 겪어보니 낯선 곳도 겁나지 않았고, 시골의 작은 학교도 크게 걱정되지 않았다. 한 달에 이틀을 쉬던 남편이 평일에 일찍 퇴근하고 주말마다 쉰다는 게 기대되고 좋았다. 아쉬운 건 오로지 단골 반찬가게였다.

그러나 그해 봄이 다 지나기도 전에 아쉬운 게 천 가지, 만 가지가 된다. 무엇보다 남편의 새 직장은 기대와 달리 저녁이 있는 삶을 보장해 주는 곳이 아니었다.

이전보다 여유시간이 생겨도 남편은 낡아빠진 집과 텃밭을 돌보느라 여전히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 어쩌다 식탁에 둘러앉아도 아이들이 시끄럽다며 따로 밥을 먹겠다고 했다.

아이들의 일상에 아빠가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시골까지 들어왔는데, 오히려 아이들 앞에서 싸우고 한숨 쉬는 날만 늘어났다.

 

사진 내리리 영주
사진 내리리 영주

 

처음엔 기대와 달라 실망한 마음을 시골살이의 즐거움으로 채워보려고 했다. 통학버스가 들어오지 않아 어린이집에 보내지 못하는 막내를 데리고 동네 이곳저곳을 탐색했다.

아이가 불쑥 들어간 어르신들 집에서 진한 커피믹스만큼이나 진한 환대를 받았다. 그럴 때는 이웃 간의 정이 살아있는 곳에 살게 되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가끔은 그 정이 너무 과격하게 표현되는 바람에 당황할 때도 있었다. 어느 날은 아이 셋과 읍내 가는 버스를 탔는데 낯선 어르신이 어깨를 툭 치면서 아는 체를 했다. 그러고선 다짜고짜 “그 집 얼마 주고 샀능교?” 하고 물었다. 일면식도 없는 사이에 하기엔 너무 무례한 질문이었다. 순간 버스 승객 모두가 나를 쳐다보고 있어서 나는 낯빛도 바꾸지 못하고 우물쭈물 그 순간을 넘겼다.

마냥 걸으면 좋을 줄 알았던 고즈넉한 시골길도 좋은 산책로는 아니었다.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개울은 아름다웠지만 중간중간 악취를 풍기는 돼지 축사를 만나면 숨을 참으며 아이를 안고 뛰어야 했다.

정식으로 마련된 산책로가 아니라 임도를 따라 숲길을 걷다 보면 인적이 없고 으슥한 구간이 많아 등골이 오싹했다. 아이들도 내 불안을 느끼는지 느긋하게 산책을 즐기지 못하고 자꾸만 집에 가자고 보챘다. 동네를 산책하려니 사람이 너무 없는 길이라 차들이 우리만 만나면 급브레이크를 밟아대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주변 사람들이 학령기 아이를 데리고 시골로 들어가는 것을 우려할 때, 내 마음속엔 두려움보다는 기대가 컸다. 대안교육을 공부하는 모임에서 작은 학교에 근무하는 교사들을 만난 적이 있어, 시골 작은 학교의 장점도 두루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2학년 반에 들어간 첫째의 선생님은 아주 좋은 어른이자 교사였다. 예민하고 내성적인 아이라 걱정이 많았지만, 선생님의 세심한 배려와 친구들의 환대 속에서 빠르게 적응했다. 공책의 글씨가 반듯반듯 해지더니 급기야 학년이 끝날 때 들고 온 학급문집 표지엔 첫째가 그린 그림이 당당히 걸려 있었다.

문제는 둘째의 유치원 생활이었다. 규칙과 규율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선생님을 만나게 된 것이다. 아이가 매일 운다는 얘기를 전하던 선생님은 내게 발달검사를 해보라고 권했다. 열 명도 안 되는 아이들을 좀 더 다정하게 돌봐줄 순 없는지, 엄마로선 야속할 따름이었다.

노심초사하며 등원시킨 아이가 시무룩하게 돌아오는 나날이 이어졌다. 내가 아이를 잘못 키운 게 아닌가, 자책하게 되었다. 가능하면 자연스럽게, 자연 가까이에서 아이들을 키우겠다던 육아관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혼자서 세 아이를 돌보느라 쉴 틈이 없으니 체력도 바닥을 보였다. 돌봄과 집안일 사이, 잠시 쉬려고 앉으면 눈에서 눈물부터 흘렀다.

내가 유배를 왔구나, 나는 무능한 사람이구나. 갑갑하고 답답한 마음이 견딜 수 없을 때쯤 문득 마음속에서 절박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대로 말라죽을 바에야 도로에서 죽자!’

일단 나가보기로 했다. 장을 보고 병원에 가는 것마저 남편 쉬는 날에 맞춰야 했던 답답한 상황부터 내 손으로 풀어보자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운전 연수를 받았다. 그 작은 변화가 내 숨통을 텄다.

막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읍내 도서관에 가서 육아서가 아닌 책을 빌려 경치 좋은 곳에 자리 잡은 카페로 갔다. 정기적으로 개인 상담을 받기 위해 가까운 대도시인 대구도 다녀왔다. 그때까지는 책을 읽고 커피를 마시고 상담을 받으러 가는 그 여유가 다른 길을 열어줄 거란 기대까진 없었다. 그저 살고자 하는 몸부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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