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드릭, 지금은 뭐해?”

“색깔을 모으고 있어. 겨울엔 온통 잿빛이잖아.”

 

‘책방 그림이 글에게’ 박혜련 대표님의 목소리는 나직하고 부드러웠다. 과장이 없는 목소리 덕분에 나는 그림책 속 이야기 세계에 푹 빠져있었다.

열심히 일하는 들쥐들 사이에서 ‘동그마니 앉아 풀밭을 내려다보고 있는 프레드릭’이라는 구절에서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서 ‘정신 차려라, 프레드릭! 친구들 일하는 거 안 보이나?’하고 혼을 내주고 싶었다. 그 순간 “아! 귀여워!” 하는 다정하고 촉촉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최00 대표님의 눈꼬리와 입꼬리가 활짝 웃고 있다. “프레드릭 너무 귀여워!”라고 말하는 목소리를 통해 전해지는 기운이 너무 따스해서 혼을 내고 싶던 마음은 거품처럼 사라지고, 갑자기 나도 프레드릭이 귀엽게 느껴졌다. 들쥐 친구들이 ‘너는 시인’이라며 박수와 환호를 보내자, 프레드릭은 얼굴을 붉히며 ‘나도 알아’ 하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세이레 학당’ 회원들 사이로 프레드릭에 대한 사랑스러운 감정이 넘실거렸다. 특별한 작업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그 순간 내 안의 무언가가 치유되는 느낌이 있었다. 나는 ‘내 안의 프레드릭’이 늘 싫고 답답하다. 꿈꾸듯이 사는 내가 버거워진 지 오래되었다. 세 아이의 양육자답게 좀 더 현실적인 감각이 있길 자신에게 아무리 다그쳐도 아무리 애써도 달라지지 않는 게 너무 속상하던 참이었다.

 

이날은 세이레 학당 회원들이 군위군농촌활력지원센터의 지원으로 ‘자기 돌봄과 상호 소통을 위한 MBTI’ 워크숍을 진행한 날이었다.

박혜련 대표님의 목소리에 실려 나에게 다가온 프레드릭이 처음에는 답답하고 얄미웠다. 하지만, 나와는 다르게 프레드릭을 사랑스럽게 보는 눈길과 감정이 나에게도 닿아서, 순식간에 프레드릭이 달리 보였다. 나는 MBTI 성격검사에서 ‘감각형/직관형’으로 나누는 기준에 따르면 치우친 ‘N’이다. 프레드릭과 프레드릭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공부벗 덕분에 ‘N’, ‘직관형’이라고 구분되는 나의 패턴을 조금 긍정적으로 바라봐 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사진 내리리 영주

함께하는 공부의 맛! 내가 나를 좀 더 좋게 바라보게 되고, 곁에 있는 이들을 조금 더 믿게 되는 이런 순간이 함께하는 공부가 주는 선물이다.

 

<세이레 학당>은 군위지역 공부 모임이다.

2021년 가을에 ‘단군신화에 비친 내 모습’을 주제로 한 이야기 공부를 시작으로, 월례모임을 가지면서 함께 공부하고 싶은 것을 탐색해왔다. 기후 위기에 대한 대응으로 ‘제로웨이스트’ 공개 강연을 진행하고, ‘드로잉 워크숍’을 열기도 했다. 이 모임에서 내 역할은 총무였다. 나를 제외한 모든 회원이 농업 법인의 대표이거나 각각의 사업체를 꾸린 대표라 비교적 덜 바쁜 내가 자잘한 일을 하게 되었다. 연고 없이 이사 온 게 6년 전인데, 이렇게 대표님들과 어울리게 될 줄이야!

 

사진 내리리 영주
사진 내리리 영주

 

대표님들은 각자의 사업장에서 일이 아주 많은데도, 농민사관학교, 농업기술센터, 그 외 여러 모임을 통해서 다양한 공부를 하고 있었다. 가까이에서 본 농산업은 생산에서 판매, 고객 관리까지 하는 일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일의 양도 많은데, 농산업의 환경이 시시각각 바뀌다 보니 공부를 놓을 수가 없었다. 블로그나 온라인 쇼핑몰 관리부터, 밀키트 제작 유통이나, 제품 포장 디자인까지…. 농한기 같은 것은 없는 것 같았다. 그 많은 일을 해내고도 함께 공부하자고 모인 분들께 나는 자꾸 묻게 되었다.

“지금 바쁜 철인데 시간이 되실까요?”

늘 같은 답이 돌아왔다.

“이 시간이 쉬는 시간이에요!”

 

이 에너지에 기대어, 나도 나를 자꾸 꺼내어서 뭔가를 해보고 싶어진다. 모임에 처음 나가기 시작할 때, 나는 “저는 4시에는 집에 가야 해서요.”를 달고 살았다.

그런데 1년이 지난 지금은 자주 아이들에게 ‘엄마 모임이 있으니, 알아서 있으라.’라고 하고 저녁 마실을 나간다. 덕분에 아이들은 엄마 레이더망을 벗어나는 시간을 확보하게 되었고, 나는 아이들에 대한 나의 분리불안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우주 어딘가에 떨어져도 나는 ‘엄마사람’이라는 역할에 대한 무거운 책임감에서 잠시라도 벗어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그 사람들이 들여주는 새로운 이야기들을 들으며 관계를 맺어가니 오랜만에 피가 도는 느낌이 든다.

그래도 ‘군위군신활력플러스사업 액션 그룹’에 지원하자는 의견은 계속 반대했다.

 

세이레 학당 이름 그대로

나는 공모사업에 참여하는 것이 두려웠다. 어느 정도 모임이 자생력을 가지지 않은 상태에서 지원 사업에 참여하는 것은 혼을 뺏기는 일이라는 판단이 있었다. 공모사업에 맞춰 뭔가를 꾸며내는 일도 마땅치 않았다. 서류와 실제의 틈을 메꾸기 위해 해야 하는 말과 행동이 가져올 스트레스를 감당하고 싶지 않았다.

여러 번의 회의를 거듭하여, ‘세이레 학당’ 이름 그대로, 방향 그대로 지원하는 것으로 합의하였다. 명상이나 비폭력 대화 등 내면을 돌보는 작업과 삼국유사 읽기나 위천 탐사 등 군위지역의 문화적 콘텐츠를 공부하는 방향으로 진행하기로 하고, 사업 참여의 효율성을 위해 내가 대표가 되어 진행하게 되었다.

 

사진 내리리 영주
사진 내리리 영주

외지인이면서, 군위지역에 대해 무언가를 말하고, 어떤 모임을 대표 한다는 게 늘 부담스럽기는 하다. 이런 내 마음을 구구절절 말하지 않아도, 얼른 눈치채고 ‘나도 40대엔 걱정이 많았어.’ 하며, 개인적인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꺼내어 들려주면서, ‘지금 시도해야 관계도 생기도 일에 대한 경험도 생긴다.’라고 끌어주는 마음에 기대어 바들바들 떨면서 한 발을 내디딘다.

우연히 소설가이자 번역가인 이윤기 작가님의 책 <이윤기가 건너는 강>을 읽다가 작가님 고향이 군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유명한 작가님의 고향인데, 왜 몰랐지? 하며 읽어내려가다가, 작가님의 복잡한 속내를 만나게 되었다.

 

군위군의 우보면 두북동 2구가 나의 고향이다.

내 고향 이야기는 쓰지 않으려고 했다.

내 고향 사진은 내 얼굴과 함께 박아내려고 하는 미디어의 모든 시도에 조금도 협조하지 않았다. 소설가는 프로 거짓말 꾼인데 고향 마을을 공개해놓으면 거짓말하는 데 지장이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도 나는 왜 용기를 내어 이렇게 하고 있는가? (위의 책, 110쪽)

 

나는 어머니 무덤이 있는 우리 집 선산의 다복솔에 덮인 작은 산등성이가 그리워서 새벽 술 마시면서 식구들 몰래 눈물을 훔치고는 했다. 내게 그 작은 산등성이가 세계의 중심이다. 나에게 어머니는 유한(遺恨)과 동의어다. 슬픈 그리움의 원적(原籍)이다. 어머니의 무덤이 있는 고향도 그렇다.

내 어리던 시절에는 ‘안동 양반, 의성 사람, 군위 것들, 대구 놈들,’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반촌(班村)으로 이름난 안동에서 의성과 군위를 거쳐 대구 쪽으로 내려갈수록 반성(班性)이 묽어진다는 수구적인 우려에서 나온 말일 게다. (위의 책, 114쪽)

세이레 학당 모임에서 이윤기 작가님을 소개하고 작가님의 작품을 읽는 모임이 군위지역에 하나쯤 있으면 어떨까 하는 제안을 하며, 내가 인상적으로 읽은 구절을 소개했다.

‘안동 양반, 의성 사람, 군위 것들’ 이 부분에서 모두 빵 터졌다. 나는 좀 어리둥절했지만, 모두가 ‘군위 것들’이라는 표현을 몹시 재미있어했다. 군위가 고향이거나 최소 10년 이상 거주한 분들께 ‘군위 것들’이라는 표현이 주는 쾌감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군위의 오래된 것, 군위의 유명한 것을 찾아 전시할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 군위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나누는 공부가 하고 싶어졌다.

군위군신활력사업단에서는 계속 참여하는 모임들이 군위지역사회에 어떤 활력을 줄 것인가 물었다. 그 물음 덕분에 그냥 우리끼리 좋은 공부를 넘어 세이레 학당이 뿜어낼 향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1차 지원으로, 회원 각자와 회원 간의 이해를 돕는 공부를 진행하면서, 다음 행보는 ‘잡지를 만들어 보자.’라는 꿈을 꾸게 되었다. 생산물을 홍보하는 목적의 인쇄물이 아니라, 군위지역에 사는 ‘군위 것들’의 이야기를 담아보자는 데로 마음이 모였다. 2차 지원에는 세이레 학당이 군위군 시민기자가 되어 지역의 이야기를 생산해 내겠다는 그림을 담아보았다. 기존에 해왔던 내면을 돌보는 작업의 여정도, 글로 그림을 풀어내어 지역사회와 나누겠다는 목소리를 기획서에 적어보았다.

 

<군위 것들>의 이야기

세이레 학당 회원들은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겨울나기를 준비하는 프레드릭의 친구들처럼 부지런히 성실히 일하고 또 일하는 이들이다. 생업을 유지하고 관계의 울타리를 지키느라 바빴던 마음을 내려놓고, 세이레 학당에서 만나 우리 안의 프레드릭을 꺼내어본다. 함께 공부하며 수줍게 꺼내놓는 각자의 프레드릭을 서로 사랑스럽게 바라봐 주는 작업을 해왔다.

곧 군위군신활력플러스사업의 2차 지원 결과가 발표된다. 2차 지원에 선정이 되면 조금 빠른 속도로, 선정이 안 되면 조금 여유 있는 속도로, <군위 것들>의 이야기가 담긴 지역 문화 잡지가 싹을 틔울 것이다.

뉴스와 통계로 만나는 지방소멸위험 지역에는 없는 것이 많다. 미래를 그려낼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외지인인 나는 뉴스와 통계에 나오는 지표들의 차가움과는 다른 따스함을 사람들 사이에서 만나게 된다. 그 온기 속에 다양성도 있고, 창조성도 있다는 것을 좀 더 적극적으로 말하고 싶어진다.



사진 내리리 영주
사진 내리리 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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