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들에게 플라톤의 이데아를 처음 소개하는 사람이 되어서 정말 기뻐요.”라고 들뜬 목소리로 청소년들에게 말하고 있는 나를 생각하니 또 부끄럽다.

아이들에게 내 목소리, 표정이 어떻게 다가갔을까? 하지만 내 마음은 정말 그랬다.

아이들의 얼굴은 ‘뭥미?’가 틀림없는데, 내 욕심으로는 아이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아이들이 어떤 입구에 들어서기를 기대해 본다. 서양철학사라는 세계의 입구 말이다.

 

2022년 상반기에 가장 기쁘고 설레고 긴장되었던 일은 ‘소피의 세계’를 청소년들과 함께 읽게 된 것이다.

누가 억지로 시킨 일이 아니라, 자청해서 한 일이다.

군위군청소년상담복지센터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청소년 동아리를 운영하고자 한다는 소식을 듣고, 내가 ‘청소년 인문학 공부 모임이 있으면 어떨까?’하고 제안을 드리고, 자원 활동이 가능하다고 목소리를 냈다.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대학에서 철학과 한문교육을 공부하기는 했지만, 너무 오래되어 전생같이 아득하게 느껴지는 일이고, 청소년기 아이들을 만난 지도 한 20년은 지난 일이다.

‘내가? 과연?’이라는 의심스러운 질문이 내 안에서 매 순간 올라왔다.

그럴 때마다, 지금 여기에서 내가 청소년들과 나누고 싶은 게 무엇인지를 떠올려 보았다.

 

군위지역에서 양육자로 살면서 가장 걱정스러웠던 부분은 ‘열등감’ 또는 ‘패배감’이다.

적고 보니 정말 더 조심스럽고 오해를 살까 봐 두렵지만, 용기를 내어 나의 짧은 생각을 드러내어 본다.

아이 셋을 데리고 이사 왔다는 이유만으로 환대를 받았지만, 환대를 받는 그 순간부터 “언제 이사 나가나?” 하는 말을 들었다.

또, “애들 크면 대구에 나가야 할 텐데 뭐 하려고 이사 왔나?”라고도 했다.

당황스러웠다. 청소년기 아이들을 양육하기에 적절하지 않다는데 깊은 공감대를 가지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그러면 “좀 필요하다고 느껴지는 것들을 만들어가고 교육청과 군청에 제안해 보면 어떨까” 하면, ‘군위에서는 안 된다.’ ‘관공서는 노인들만 챙긴다.’는 답을 들었다.

꽉 막히고 답답한 공기가 익숙하다 싶었을 때, 내 고향 포항이 떠올랐다.

고향을 벗어나는 게 유일한 꿈인 흔한 청소년이었다.

 

내가 살던 동네에는 ‘자전거 도로’라는 길이 있었다. 지금은 포스코라고 부르는 포항제철의 노동자들이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하던 길이다. 황토색 출퇴근복을 입고 줄을 지어 페달을 밟은 아저씨들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러다 금방 출퇴근 버스가 생겼고, 또 금방 자가용 출퇴근이 자리를 잡았는데 아직도 그 도로 이름에는 그 풍경이 남아있다. 인근 농산어촌에서 유년기를 보내다가 좀 자라 성인이 되어 포항제철의 노동자가 되었을 그이들은 마음에 상처가 많았던 것 같다. 사회책에서 ‘도시화’‘산업화’라고 배웠던 한 시대의 특성은 어떤 사람에겐 뿌리 뽑힘이고 어떤 사람에겐 큰 파도였던 것 같다. 유년기 내 눈에 그이들은 술에 취하고, 화나 있고, 싸우고 있었다. 그런 일상의 모습들은 자라는 아이들에게 ‘공부해서 여길 떠나라!’는 메시지를 강렬하게 주었다고 생각한다. 고향에 남아서 고향을 아름답게 가꾸어야 한다는 마음을 품을 순간이 단 한순간도 없었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생기기도 전에, 내가 나고 자란 곳을 지긋지긋해 하는 마음의 결이 새겨졌다.

 

군위지역이 인구소멸위험지역으로 뉴스에 나올 때, 기자들은 운영되고 있지 않아 낡은 병원과 쓰러져가는 빈집들 텅 빈 거리를 카메라로 비추면서 문제가 심각하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더 심각하게 느끼는 것은 어른들의 입에서 나오는 푸념들이다. ‘군위에서는 안 돼. 해봤는데 안 돼’ 틀린 말은 하나도 없다. 모두 자기의 삶이 고단해 내어놓은 한숨들이지만, 그것이 지역의 공기가 되고 그 공기 속에 아이들이 자라고 있다.

낡은 병원에 다시 치유의 기운을 불어넣고, 쓰러져가는 빈집들에 다시 삶의 온기를 불러오고, 거리에 오가는 사람들의 생기를 넘치게 할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 누구인가? 하고 묻고 싶은데 어디에다가 물어야 할지 모르겠다. 그걸 묻는 것이 지친 마음들에 할 일인가 싶기도 하다.

 

지난 6월 지방선거 선거 운동 기간 군위지역 거소투표 부정 의혹이 뉴스로 나왔던 것을 청소년 학당 모임에 가져와 보았다. 선거가 있었던 주의 주말이라 군위지역의 선거 열기가 채 가라앉지 않았던 시점이었다. 그 열기가 청소년들에게도 가닿고 있는지 궁금했다. 부산지역에서 있었던 식단표 논란으로 질문을 던지자, 청소년들의 눈빛에 생기가 도는 것이 바로 느껴졌다. 식단표의 힘이었을까?

“식단표에 ‘투표는 국민의 힘’이라고 적혀있다면, 이것은 선거법 위반일까 아닐까?”로 시작하여, 청소년들에게는 투표권이 없으니 상관없다는 이야기부터 나와서, 20년 전 선거권 연령 하향 조정을 위한 청소년 인권운동에서부터, 군위지역 선거의 특징, 부정 선거의 역사, 한국 선거의 시작까지 아이들과 나눌 수 있었다.

선거 이야기를 나누니 재미있다는 반응이 참 반가웠다.

 

이날도 ‘소피의 세계’ 일부를 함께 읽고 그중에 와닿는 문장을 공책에 옮겨 적었다.

 

바로 각 개인이 독자적으로 ‘어떻게 사회를 조직할 것인가’하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게 된 거야.

이 문장이 가장 많이 적혔다는 사실이 신비하게 다가왔다.

 

ⓒ내리리 영주
ⓒ내리리 영주

여섯 명의 청소년들과 ‘소피의 세계’를 함께 읽은 이 시간이 아이들 내면에 어떤 감흥을 불러일으킬지 너무 궁금하다. 재미있었으면 좋겠는데, 그건 두 번째 모임에서 포기했다.

재미가 없는 재미가 있는지 고맙게도 꾸준히 오는 청소년들이 있다.

아이들이 학업 문제, 관계 문제로부터 살짝 떨어져서 ‘소피의 세계’를 통해 만나는 서양철학의 질문들 속에 잠시 놀다 갔으면 좋겠다.

오늘 내가 군위지역에 살면서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들을 테이블에 올려 이야기를 나누면서, 어른들만의 군위가 아니라 ‘나의 삶터’이기도 하다는 감각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되면 좋겠다.

 

〈소피의 세계〉, 요슈타인 가아더, 장영은 옮김, 현암사
〈소피의 세계〉, 요슈타인 가아더, 장영은 옮김, 현암사

나는 청소년들에게 군위가 좋다고 말한다. 실제로 좋다.

이주해 온 사람으로서 보는 군위는 아름답고 흥미로운 것들이 많다.

그런 마음으로 발견한 소식이나 풍경들을 아이들과 나눈다.

군위지역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이 자신의 고향을 좋게 보길 바란다.

자신의 내면에서 떠오르는 온갖 희한한 질문들도 좋게 보길 바란다.

그 질문들을 분별하는 연습을 함께하고, 그 질문들에 힘을 실어주는 어른 사람으로 아이들 곁에 설 수 있으면 좋겠다.

 

인구 소멸 위험지역이라 나에게도 청소년을 만날 기회가 온 것 같다.

텅 빈 이력서로 무얼 할 수 있을까 막막한데, 양육으로 보낸 시간과 경험을 인정해 주고, 양육자 이전에 내 경험들에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참 고맙다. 청소년 학당을 자원 활동을 제안해 준 군위청소년상담복지센터는 내가 양육자 처지에서도 여러 도움을 받았다.

지역사회에서 도움을 받고 또 내 것을 내어놓은 순환 속에 살고 있다는 느낌이 참 좋다.

인구소멸위험지역이라 사람이 귀하다 보니, 보잘것없는 나도 귀하게 쓰이는 순간이 왔다.

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어쩌면 인구소멸위험지역이 어떤 시대적 모순의 가장자리가 아니라, 가장 먼저 단풍이 들기 시작하는 가을 나무의 가지 끝인지도 모르겠다.

 

ⓒ내리리 영주
ⓒ내리리 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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