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으로 답답함이 많이 해소되긴 했지만 나 혼자 상담받는다고 남편이 갑자기 살가워지진 않았다. 그래도 미칠 것 같은 답답함의 원인이 모두 남편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으니 화만 나면 남편에게 화살을 돌리던 습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개인 상담에서 상담 선생님과 작업을 통해 유년기를 돌아보며 내가 그토록 육아에 몰입하고자 했던 이유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음을 다루는 책들을 진공청소기가 흡입하듯이 열심히 읽어나가면서, 내가 돌보지 않은 나의 감정이 남편에 대한 불만과 뒤섞인 것을 알아채게 되었다. 내 마음 다루기도 이렇게 어려운데 남의 마음에 뭘 기대할까 싶어지자 나도 좀 여유로워졌다.

그 무렵 코로나가 시작되었고 도시에서는 학교가 문을 닫으면서 양육자들이 난리라는 소문이 들렸다. 하지만 내리리는 달랐다. 60명 이하 학교는 대면 수업이 가능하다는 교육청 지침에 따라 몇 달 만에 수업과 급식이 정상적으로 재개되었고 그 이후로 한 번도 중단되지 않았다.

학교가 정상으로 운영되면서 학부모회 활동을 시작했다. 대구에서 나는 양육자 모임 리더였고, 그전에는 공동육아조합의 초등 방과 후 교사이면서 논술학원 교사였고, 더 전에는 청소년 단체 사무국장이기도 했다.

이곳으로 오며 다 사라진 줄 알았는데 학부모회 활동을 통해 다시 그 경험들이 빛을 발했다. 사람들은 번거로운 일에 나서준다며 고맙다는 인사를 했지만 나는 오히려 사람을 만나고 일을 벌이니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밀랍 랩 만들기’ ‘새활용 놀이(재활용품으로 놀이도구 만들어 놀기)’ ‘힐링커뮤니티댄스’ 등 내가 제안하는 일들이 적극적인 지지를 받아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었다. 재미있다, 의미 있다, 신선하다, 수고했다 등등의 피드백을 받으며, ‘내 인생은 끝난 건가 봐!’하며 징징거리기만 하던 내 안의 찡찡이가 자학을 멈추기 시작했다.

 

사진 내리리 영주
사진 내리리 영주

 

때때로 다른 의견이 있다고 개인적인 연락을 주는 양육자도 있다. 그래도 내가 나서서 하는 일에 대한 지지의 말을 꼭 남긴다. 워낙 사람이 귀한 곳이라 받는 인사지만, 그런 인사가 늘 고맙다. 다른 의견을 말해주는 그 마음이 고마워서 한참 통화를 하다 보면 꼭 서로의 안부도 확인하게 된다.

대구에서 참여했던 양육자 모임은 숲놀이를 공통관심사로 삼아 지인을 통해 혹은 맘카페에서 만난 사이였다. 막상 모이고 보니, 다른 관심사들도 겹치는 게 많았다.

군위에서 만난 양육자들은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가 같을 뿐, 겹치는 점이 하나도 없었다. 조손 가정이 있는가 하면, 삼대가 한집에 사는 집이 있고, 다양한 나라에서 온 양육자들이 있고, 스마트폰에 대해 아무 규칙이 없는 집이 있는가 하면, 교육적 의도로 TV가 없는 집도 있다. 농사를 안 짓는 집도 많고, 생업이 농사라도 하우스 농사냐 과수 농사냐 따라 일상이 크게 다르다.

일상에서 공통분모가 거의 없다시피 하므로, 소통이 어려울 거란 우려는 섣불렀다. 대충 넘겨짚지 않고, 하나하나 물어보며 소통하려 애쓰다 보니 오히려 오해가 적었다.

대구에서는 ‘차이’에 주의를 기울여 ‘이 가운데 누구와 함께 할 것인가?’를 고민했던 내가, 지금은 ‘존중’을 바탕으로 ‘어떻게 하면 함께 할 것인가?’로 생각의 방향이 변했다.

학부모회가 사회생활에 대한 갈증을 풀어주었다면 문화생활에 대한 갈증은 예상밖에 쌀을 사 먹는 농장에서 풀어줬다.

내가 쌀을 사는 소보마실은 쌀 농장일 뿐 아니라, 흥미로운 문화 공간이다. 가까운 곳에서 쌀을 사 먹자는 생각으로 인연이 되었는데, 소보마실에서는 자꾸만 팜파티를 연다.

봄에는 드레스를 입은 성악가가 소보마실 마당에서 가곡을 불렀다. 여름에는 초록색으로 덮인 논을 배경 삼아 그랜드피아노가 놓인 소보마실 테라스에서 피아노 연주를 들으며, 허브 파스타를 먹었다. 티케팅 전쟁도 없고, 잘 차려입고 갈 필요도 없는 그야말로 집 앞 공연장을 소보마실이 철마다 만들어냈다.

절정은 가을이었다. 허브농장 앞마당에서 대구지역 뮤지션 ‘롱아일랜드 쟈스밴드’가 재즈 공연을 하는 날이었다. 마침 가을걷이가 한창일 때라 콤바인이 우우웅 소리를 내며 마당 공연장 옆 골목길로 지나갔다. 콤바인 소리가 콘트라베이스의 준비된 코러스처럼 들렸다. 적당한 가을바람에 살랑거리는 허브향까지 더해져 음악을 코로 들이쉬는 느낌이라고 할까. 마침 그날 메뉴는 스페인식 들밥이라는 빠에야였다. 아이들과 나는 평소에 접하기 어려웠던 낯선 음식을 재즈 음악에 섞어 맛있게 먹었다.

 

사진 내리리 영주
사진 내리리 영주

 

이러니 늘 소보마실에서 무슨 재미있는 일을 하나 SNS를 챙겨보게 되었는데, 어느 날 ‘먹거리 유통 관련 협동조합을 만들려고 하니 관심 있는 사람은 오라.’는 피드를 보고 댓글로 얼른 손을 들었다. 곧장 초대받았고 냉큼 갔다. 회의의 시작은 ‘밀키트 가공 협동조합 준비모임’이었다.

평생을 소비자로 살아온 나는 생산자들의 회의를 알아들을 수 없어서 괜히 왔나 하고 있는데 학부모회 회의처럼 여기 회의도 종종 산으로 갔다. 도시에서 회의가 산으로 가면 시간 낭비였는데 여기서는 사람이 적고 오래 봐 온 사이라 그런지 그 산 너머에 색다른 선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자주 엉뚱한 산을 오르내리는 것 같은 이 회의의 유연함이 재미있어서 나는 회의록을 몇 번 남겼다. 그랬더니 안건을 정리하고 회의와 교육 일정을 잡는 일을 맡게 되었다. 협동조합 설립에 대한 교육을 받으며, 밀키트 제작에는 식자재 유통만 중요한 게 아니라 브랜딩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군위는 ‘삼국유사의 고장’이다. 일연 스님이 군위 인각사에 오셔서 삼국유사를 완성하셨기 때문이다. 그것을 밀키트와 어떻게 연결할까를 의논하는 중에, 내가 참여하고 있는 공부 모임에서 마침 삼국유사 공부를 하게 되어 재미있게 읽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삼국유사 내용은 몰랐다며 좀 들려달라고 하여, 서출지에 얽힌 이야기, 만파식적 이야기 등 몇 개를 풀어보았다.

회의 참가자들은 삼국유사에 그런 이야기가 있었냐며, 따로 시간을 내어서 한 번 공부해 보자고 마음을 모았다. 그 공부 모임의 진행을 내가 하게 되어, 삼국유사 맨 앞에 실린 단군신화를 함께 만나보기로 했다.

그렇게 2021년 어느 가을밤에 삼국유사 읽기 모임이 시작되었다. 모임의 제목은 ‘웅녀는 왜?’였다. 나는 단군신화를 실타래 삼아 회원들이 각자의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도록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각자 그림을 그려보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그림을 통해서 저마다 주목한 부분이 다르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단군 이야기가 아이고, 웅녀 이야기 아니가? 웅녀가 다 하네!”

“나는 환웅을 만난 게 중요하다고 본다. 새로운 문화를 만나야지. 너무 고여가 있으면 되는 일이 엄써.”

“웅녀도 봐라, 그저 아들한테 다 준다. 세상 부질없대이! 상주댁이 아들도 봐라”

“나는 호랑이한테 마음이 가네. 내라도 몬 버티지.”

회원들은 단군신화를 이렇게 상세히 들어보는 것은 처음이라며 다양한 관점의 해석과 수다를 나누었다.

나는 여러 소감 중에서도 서로의 다름을 새롭게 보았다는 말이 참 좋았다. 그동안 공부했던 것이 쓸모를 발휘하는 것 같아 뿌듯했다.

이야기 속의 보편성이 회원들의 마음을 이어주는 장치가 된다는 걸 경험하게 되어 신통했다.

그렇게 공부하던 중 협동조합 대신 정부 지원 공모사업에 참여하기로 의견이 모였다. 여러 회의 끝에 현재는 ‘세이레 학당’이라는 비영리단체로 발전했다.

여기에서 나는 서류를 담당하고 섭외를 진행하고 회원들과 소통하는 일을 하나씩 하다 보니, 어느새 세이레 학당 대표가 되어있었다.

 

이런 활동들이 있기 전에, 나에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자는 마음으로 오소희 작가님이 진행하는 글쓰기 모임에 참여했었다. 글을 쓰면 쓸수록 그 안에서 이건 이래서 못하겠고 저건 저래서 못하겠다며 내빼는 내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지난 20년간의 경험을 삽질이라고 자책하는 내게 ‘병이 깊다’라는 피드백이 돌아왔다. 처음엔 그 날카로운 진단에 얼이 쏙 빠졌다. 온라인 모임이라 모니터 화면으로 넋 나간 그 얼굴을 대면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내가 한심하기만 했다. 그러다가 이렇게 된 내 상황이 안타깝다고 생각했고 끝내 나 자신이 안쓰럽다는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 파도가 지나간 자리에 몸살이 왔다. 아파서 끙끙거리면서도 글쓰기 모임의 녹음본을 듣고 또 들었다.

 

“이전에 해낸 것에 대해 당연하게 생각하지 말고 칭찬해 주면서 가 보자.”

“현실의 필요를 찾아보자. 변화의 접점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마흔 넘어서 좋은 게 있다. 나이가 주는 융통성을 잘 발휘해 보자.”

 

그제야 다른 피드백들이 귀에 들어왔고, 글쓰기 모임에서 찾고 싶었던 그 기회를 내가 나에게 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챘다.

물론 그걸 알았다고 해서 갑자기 벽이 다 부서지고 내 능력치가 올라가는 등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한 시절에 대한 평가는 그 시절의 중간에서는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발만 딱 한 발만 내디뎌보자 싶었다. 마음을 먹는다고 기회가 올지는 몰랐지만, 가능성을 닫아 두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학부모회 활동이나 소보마실 SNS를 통해 틈을 만드는 경험을 하자, 또 한 발 더 나아가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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