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여성 영화제’ 중 〈악마를 지옥으로〉영화와 씨네토크를 보고

 

 

과거에도 지금도 지구에는 수많은 내전이 벌어지고 있지만 사실 나는 그 면면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물론 관심이 부족한 게 가장 큰 이유다. 그래도 아주 가끔씩은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해서 인터넷을 뒤져보는데, 자료를 찾아 읽다가 늘 중도에 포기하곤 한다. 여전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채로.

핑계를 대자면, 내전의 맥락이라는 게 워낙 복잡하다. 문제의 발단에는 해당 지역 내의 종교·민족·문화 간 차이와 갈등,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통치하다가 슬쩍 발 뺀 제국주의 국가가 얽혀있다. 여기에 독립 이후의 혼란, 국제적 이해관계가 맞물린다. 갖가지 사건·사고도 끼어든다. (영화 〈악마를 지옥으로〉의 배경인 라이베리아는 공식적 식민 지배를 받지 않았지만, 미국이 해방 노예를 역이민 보내서 만든 국가라는 점에서 사정은 다를 바 없다.)

이런 자료들을 읽다 보면 누가 나쁜 놈인지 누구 편을 들어야 할지 모르겠다. 짱 나쁜 놈과 열라 나쁜 놈이 엎치락뒤치락 싸우는 동안 사람들이 죽어 나간다. 도무지 희망 따위는 없는 것 같다. 나는 슬그머니 인터넷 창을 닫는다.

이렇게 현실을 모른 척할 수 있는 것은 전쟁을 겪지 않고 사는 사람의 특권일 것이다. 영화 〈악마를 지옥으로〉의 등장인물들은 그럴 수가 없다.

 

‘전쟁과 여성 영화제’ 포스터
‘전쟁과 여성 영화제’ 포스터

 

‘섹스파업’으로 평화를 얻을 수 있을까

나는 이 영화를 최근에 열린 ‘전쟁과 여성 영화제’(https://www.oproject38.com/WoWFF)에서 만났다. 영화제 홈페이지에서는 이 영화를 “평범한 라이베리아 여성들이 ‘라이베리아 여성운동’을 조직해 전쟁을 평화로 이겨내는 이야기”라고 소개했다. 설명을 보면서 ‘와, 언니들 짱 멋있다’고 생각했다. 그 멋진 언니들을 스크린으로 보고 싶었다.

영화는 라이베리아 여성들의 다양한 비폭력 직접행동을 잘 보여준다. 여성들은 계급·종교의 차이를 가리는 흰옷을 입고 매일 아침 대통령이 지나는 길목에서 평화협상을 요구하는 시위를 이어나갔다. 어렵게 열린 평화협상이 끝없이 길어지자 아예 회의실을 봉쇄해버렸다. 협상이 끝날 때까지 아무도 나갈 수 없게 막아선 것이다. 결국 평화협정이 타결되고 아프리카의 첫 여성 대통령 엘런 존슨 설리프가 취임하면서 영화는 마무리된다.

특히 재미있었던 것은 ‘여성성’이 적극적으로 활용된 직접행동 사례들이었다. 라이베리아 여성들은 “총을 내려놓지 않으면 섹스를 하지 않겠다”면서 내전에 참여한 남편과 잠자리를 거부하는 섹스파업을 벌였다.

협상장 앞에서 사람들이 끌어내려 하자 여성들이 옷을 벗겠다고 한 것도 인상적이었다. 라이베리아에서는 어머니의 나체를 보는 것이 모욕이자 저주라고 한다. 미얀마 여성들이 빨랫줄에 치마·속옷·생리대 등을 걸어서 군경의 진격 속도를 늦춘 사례도 떠올랐다. 미얀마에서는 이런 물건 아래를 지나가는 남성이 힘과 명예를 잃는다는 미신이 있다.

예전의 나는 이렇게 ‘여성성’을 활용하는 직접행동 방식에 비판적이었다. 혹여라도 ‘성을 이용해 남성을 조종하는 여성’, ‘성애화된 여성’, ‘어머니로서의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강화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좀 바뀌었다. 조심해서 정교하게 잘만 사용하면 가부장제를 깨뜨릴 수도 있겠다 싶다.

섹스파업을 결의하면서 영화 속에서 여성들은 “거부하고 싶을 땐 거부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들의 섹스파업은 어쩌면 ‘아내는 남성의 성욕을 채워줘야 한다’는 인식을 바꿀지도 모르겠다. 옷을 벗는 행동 혹은 협박은 ‘희생하는 어머니’를 ‘싸우는 여성’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비록 여성의 성(性)이나 모성이 가부장제가 준 힘일지라도 여성이 주체가 되어 이를 사용하는 순간 의미가 전복될 수 있다. 잘만 사용한다면 말이다.

 

라이베리아 내전이 한창이던 2003년 7월, 여성들이 몬로비아의 미국 대사관 앞에서 시위하고 있다. 영화 〈악마를 지옥으로〉 중 한 장면.
라이베리아 내전이 한창이던 2003년 7월, 여성들이 몬로비아의 미국 대사관 앞에서 시위하고 있다. 영화 〈악마를 지옥으로〉 중 한 장면.

 

전쟁이 끝나도 평화는 완성되지 않는다

이어진 ‘씨네토크’에서는 가람 전쟁없는세상 활동가, 김영 경희대학교 아프리카연구센터 연구원이 패널로 참여했다. 덕분에 등장인물 중 가장 주도적으로 운동을 벌인 리마 보위의 이후 활동, 영화에는 나오지 않는 라이베리아의 상황도 전해 들을 수 있었는데…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리마 보위는 라이베리아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참여했지만 끝까지 활동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래도 세계 여러 나라의 여성들과 함께 평화운동을 이어나갔다. 마침 가람 활동가가 대학원 과정에서 리마 보위를 만난 적이 있는데, 영화에서처럼 단단하고 강하고 멋진 여성이었다고 한다. 나중에 찾아보니 리마 보위는 2020년 방한해 DMZ포럼에도 참여한 바 있다.

엘런 존슨 설리프는 평화롭게 정권을 이양했다. 그러나 국민이 선출한 새 정권의 부통령은 평화협상으로 쫓겨난 찰스 테일러 대통령의 전 부인이었다. 게다가 라이베리아에서 벌어진 전쟁범죄로 인해 처벌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피해자도 너무나 많았지만, 가해자 역시 너무 많았던 것이다. 소년병처럼 피해자이자 가해자인 경우도 많았다.

‘불행 끝 행복 시작’을 바란다면 좀 허탈한 결론이다. 그러나 라이베리아 여성들은 평화가 꾸준한 과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영화는 평화협정 이후 상황도 담고 있는데, 그때도 이들은 운동을 멈추지 않았고 UN 평화유지군이 들어온 뒤에는 무기 회수 활동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여성들은 평화로 나아가기 위해 가해자를 용서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냥 군인들끼리 서로를 죽이는 전쟁도 아니었다. 오랜 세월 민간인이 납치·절단·폭행·강간·살인 등을 겪어야 했다. 어떻게 용서가 가능한 지 나로선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여성들은 가해자를 용서했고, UN 평화유지군에는 반발하던 군인들이 결국 이들에게 설득되어 총을 내놓았다.

협상이 끝났다고 평화가 오는 것이 아니듯이 총을 거둬들였다고 해서 또는 새로운 대통령을 뽑았다고 해서 평화가 오는 것도 아니다. 지금의 라이베리아 상황이 잘 보여주듯 말이다. 그러나 라이베리아 여성들은 멈추지 않고 평화로, 더 평화로 계속 나아갈 것이다.

 

라이베리아 내전 당시 여성들의 평화 시위를 이끈 리마 보위. 사진=Fronteiras do Pensamento
라이베리아 내전 당시 여성들의 평화 시위를 이끈 리마 보위. 사진=Fronteiras do Pensamento

 

여성이라고 평화를 더 사랑할 리는 없지만

홈페이지의 영화 소개에는 “남성들이 ‘강대강’ 총력전을 결의하고 파국으로 치달을 때, 생명을 위해 싸우는 여성들이 있었다”는 구절이 있다. 그러나 사실 나는 ‘남성=전쟁, 여성=평화’로 도식화하는 서사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일단 그냥 관객 또는 독자로 말하자면, 너무 빤하고 납작해서 재미가 없다. 페미니스트로 말하자면, 자칫 성별이분법을 강화할 수 있는 데다가 실제 상황과도 맞지 않는다. 여성도 다양한 방식으로 전쟁에 참여하고 전쟁을 지지한다. 여성도 얼마든지 잔인해질 수 있다. 남성도 전쟁을 거부하고 평화를 만들 수 있다.

다만, 여성이 전쟁과 관계 맺는 방식은 남성과 좀 다르다고 생각한다. 전쟁 체계가 매우 강력하게 젠더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여성이 평화와 관계 맺는 방식도 남성과는 좀 다를 것으로 생각한다. 여성이라고 해서 본능적으로 평화를 사랑할 리는 없지만, 여성이라는 위치 덕분에 전쟁을 좀 더 다르게 인식할 가능성, 평화와 좀 더 새롭게 관계 맺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씨네토크에서 가람 활동가는 “한국의 무기 수출이 세계 9위이고,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순위가 크게 올라갔으며, 한국 최대의 무기회사인 한화 에어로스페이스의 대주주는 바로 국민연금”이라고 알려주었다. 먼 나라의 전쟁이 나의 노후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아무리 모른 척해도 이미 나는 전쟁과 관계를 맺고 있다.

아마도 ‘여성으로서’ 전쟁과 관계 맺고 있겠지만, 여성이라는 내 정체성과 전쟁이 어떤 영향을 주고받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또한 시스젠더, 비장애인, 비인간동물로 전쟁과 관계를 맺고 있을 것인데 이 부분 역시 아직 탐구 대상이다.) 전쟁과 관계를 끊고 평화와 더 가까운 관계를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는 더더욱 모르겠다. 하지만 괜찮다. 늘 그랬듯이 동료 시민들이, 라이베리아 여성과 수많은 여성이 나에게 길을 알려줄 것이다.

 

글 _ 열쭝 전쟁없는세상 회원

 


※ 이 글은 병역거부, 반전평화운동 단체 <전쟁없는 세상> 블로그(http://www.withoutwar.org/?page_id=10640)에 최초 게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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