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에 여행 갔다가 카지노에 빠져 돈을 잃는 것도 부족해 직장과 가정까지 잃게 된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런 뉴스를 접할 때 카지노의 어떤 점이 멀쩡한 사람을 망가뜨릴까 하는 생각을 품게 됩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이 글과 관련하여 저는 개인의 ‘성찰 능력’을 마비시키는 카지노의 구조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카지노에는 사람이 거주하는 보통의 건물에는 반드시 있는 세 가지가 없다고 합니다. 시계와 창문 그리고 거울입니다. 시계와 창문이 없으면 고객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밤새도록 주머니가 털립니다. 하지만 저는 이 세 가지 가운데 가장 치명적인 것이 거울이라고 생각합니다. 거울이 없으면 영혼까지 털리기 때문입니다. 교사가 카지노를 들락거릴 일은 없지만, 사람이 자기 검열을 게을리하면 누구나 망가질 수 있기에 이를 반면교사 삼자는 뜻에서 다소 불편한 주제로 글을 열어봤습니다.

만물의 영장으로서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속성을 호모 사피엔스라 이릅니다. 라틴어로 ‘homo sapiens’는 ‘지혜로운 인간’이란 뜻이죠. 인간이 다른 동물들보다 지혜로울 수 있는 것은 생각하는 능력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동물들도 기초적인 생각은 합니다. 비고츠키의 용어로 하등정신기능(lower psychological function)이라는 겁니다. 이에 반대되는 고등정신기능higher psychological function은 오직 인간만이 지니고 있는 사유 능력입니다.

비고츠키는 인간의 고등정신이 메타인지(metacognition)에 말미암아 발달한다고 했습니다. ‘meta-’는 ‘~위에 있는 beyond’, ‘~를 초월하는 transcending’의 의미여서 메타인지는 ‘인지 위의 인지’ 즉, 인식 주체가 자신의 인식을 인식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가끔 ‘내가 왜 이러지?’라거나 ‘내 판단이 맞나?’라는 생각이 들 때 메타인지가 작동되는 것입니다. 메타인지는 또한 학습의 성패를 좌우하기도 합니다. 학습 능력이 낮은 아이들은 대부분 자신의 앎을 알지 못합니다. 자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를 알아야만 현재 아는 것을 바탕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것을 바로 잡아갈 수 있는데, 이에 대한 분별력이 없으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수학 문제는 메타인지를 가동하여 쉽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 연습장에 내가 방금 풀이한 계산 과정을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삶에서 만나는 문제들은 수학에서 계산 과정에 해당하는 정신 과정(mental process)을 내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더 높은 수준의 메타인지가 요구됩니다. 성찰 또는 반성이라는 이름의 정신 과정입니다.

 

성찰에 해당하는 영단어 ‘reflection’은 ‘reflex(반사)’와 같은 어원으로 ‘등을 구부리다, 반사하다, 반영하다, 비추다’의 뜻을 품고 있습니다. 카지노에 거울이 있으면 고객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 성찰과 반성을 하게 될 것입니다. 고객의 그런 자세는 카지노 업주에게 바람직하지 않기에, 거울을 없앰으로써 성찰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카지노에서 돈독이 올라 있을 때는 얼굴이 일그러져있을 것이기에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확인하는 것으로 망가져 가는 자아를 인식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정상적인 일상에서 사람은 자신이 변질되어 가는 것을 직시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모니터링이라는 무형의 거울이 필요합니다.

미드(G.H. Mead)는 자아를 주체적 자아(I)와 객체적 자아(me)로 구분했습니다. 주체적 자아는 자신이 생각하는 나이고, 객체적 자아는 다른 사람의 눈에 비친 나입니다. 주체적 자아와 객체적 자아는 그 자체로는 어느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주체적 자아가 강한 사람은 소신 있는 사람일 수도 있고 고집불통일 수도 있습니다. 객체적 자아를 많이 의식하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일 수도 있고 자존감이 낮은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대개 어릴 때는 객체적 자아의 영향을 많이 받지만, 나이가 들면서는 ‘마이 웨이’를 가게 됩니다.

교사가 소신이 있는 것은 좋은 자질입니다. 하지만 그 소신은 교무실에서 발휘해야지 교실에서는 아닙니다. 교실 수업에서 소신을 내려놓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학생들과의 상호작용에서 절제하자는 겁니다. 우리는 어제보다 내일 더 나은 교사가 되고 싶다면 학생들의 눈에 비친 객체적 자아를 의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한 학기에 한 번씩 수업과 학급경영에 관한 모니터링을 시도해 보실 것을 제안 드리고 싶습니다.

그럴 필요성을 못 느낀다고 하시더라도 충분히 공감합니다. 지금보다 더 젊었을 적에 제가 그랬기 때문입니다. 곧 육십을 바라보는 지금 교사로서 그간 아이들 눈에 비친 저의 객관적 자아를 돌아보건대 저는, 이삼십 대엔 아이들에게 좋은 선생님이었고 사십 대엔 나쁜 선생님이었습니다.

이삼십 대엔 젊다는 이유만으로도 학생들에게 인기 많은 선생님일 수 있었습니다. 사십 대엔 이삼십 대보다 10~20년 더 나이가 들었음을 계산하지 못하고 여전히 아이들에게 젊고 매력적인 교사일 것이라 착각했습니다. 그런 착각만으로 그치면 나쁘지 않으련만, 이삼십 대 때보다 실력이 더 늘었기에 유능한 교사일 테니 아이들도 나를 그렇게 생각하리라 믿었습니다. 설령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괘념치 않고 씩씩하게 내 갈 길을 갔습니다. 가장 나쁜 것은 적잖이 권위적인 방식으로 학생들을 대했던 점입니다.

오십 대에 접어들어 나이를 의식하기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어떤 위기의식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인간지사 새옹지마인지라, 위기는 곧 기회입니다. 아이들이 나를 어떻게 바라볼까 하는 객체적 자아의식이 발달하면서 비로소 성찰적인 교실살이를 성실히 영위해갈 수 있었습니다. 올해 제가 맡은 아이들 가운데 1/3은 재작년 3학년 때도 담임했던 아이들인데, 그때보다 지금 조금 덜 나쁜 꼰대로 아이들을 만나고 있는 것으로 자평해 봅니다. 그리고 작년보다도 아주 조금은 더 유능하고 친절한 교사가 된 것 같은 느낌입니다. 내년에도 5학년을 하면 2년 전에 비해 내가 얼마나 더 성장한 모습일까 생각하니 마음이 설렙니다.

인간은 타고난 자질이 아무리 훌륭할지라도 저 혼자서는 좋은 사람이 못 됩니다. 좋은 사람은 나 스스로가 좋다고 판단해서가 아니라 공동체로부터 그렇게 인정받을 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카지노에 거울이 없듯이 교실 공동체에도 나의 자질을 반영하는 거울이 없는 까닭에 교사는 학생들 눈에 자신이 어떻게 비치는가에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보다 훨씬 젊었을 때 저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젊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게 자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시절엔 학생들에게 호응 받는 교사였지 좋은 교사는 아니었습니다. 역설적으로 나이가 들어 아이들에게 비친 나의 객체적 자아를 반추하게 되고 내가 지닌 이런저런 한계와 단점들을 극복해가면서 해마다 조금씩 덜 나쁜 교사로 성장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사가 나이를 먹는 것은 좋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글 _ 구미 사곡초 교사 이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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