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모든 삶이 다 ‘나 같아서’ 쉽게 고개를 돌릴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내가 하는 일을 이용하기로 했다. 작은 매체를 통해서나마 내가 외면할 수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내고, 너무 세밀해서 징글징글한 이야기를 정직하게 풀어보기. 숭고하기보다 정직하게. p95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직업과 함께 목소리를 내는 것은 많은 함의를 지닌다. 노동 시장의 차별 언덕을 오르내리는 그 직을 천직으로 삼은 것은 애쓰는 삶을 쓰고자 하는 숙명과 연결되어 있다.

 

책 〈제법 괜찮은 사람이 되어가는 중입니다〉, 권지현, 책과이음, 2022. 6.
책 〈제법 괜찮은 사람이 되어가는 중입니다〉, 권지현, 책과이음, 2022. 6.

 

이 책은 화려한 방송국이 궁금하고 라디오가 좋아 방송을 시작한 20년 차 베테랑 작가가 썼다. 많이 서투르고, 지금도 서투르지만, 제법 괜찮은 사람이 되어보려고 고군분투했던 날을 기록한다. 작가는 TBN 한국교통방송 대구 본부 라디오 프로그램 방송작가, 방송작가유니온(전국언론노동조합 방송작가지부) 영남지회장으로 살고 있다.

책은 3부로 나눈다. 1부는 나고 자란 지역에서 방송국 작가로 성장하기까지 이야기, 2부는 작가로 살면서 마주한 징글징글한 삶을 사랑하는 이야기, 마지막 3부는 노동과 연대에 관한 작지만 큰 이야기다.

작가는 2003년 대구 지하철 참사 현장을 지켜봤던 참사 취재팀 메인 작가였다. 근로계약서도 존재하지 않던 프리랜서 방송작가는 분유 떼기, 기저귀 떼기 미션을 거쳤지만 대단한 방송작가도, 노련한 엄마도 되지 못했다. 돈 없이도 일해야 하고, 글발보다 체력발이 좋아야 하고 성희롱쯤은 언어의 유희로 생각해 흘려들을 줄 알아야 하는 방송작가의 세계를 생생하게 전달한다.

나 또한 오랜 시간 직업을 가졌고, 고용 단절되었다가 복귀했고, 부당한 고용 관계에 눈물 빼며, 버티며 아이를 돌봤다. 작가처럼 끈질긴 천직은 아직 없으나, 작가의 세상을 닮고 싶어 슬쩍 삶을 포개본다. 이 책이 눈이 가고 마음이 가는 이유다.

 

감정의 밑바닥까지 건드리는 글쓰기를 통해 우리는 더 이상 아프지 않고, 부끄럽지 않으며, 그래서 좀 더 괜찮은 삶을 만들어간다. 스스로의 삶에 책임감을 갖기 위해, 주체적으로 삶을 이끌어 가기 위해 애쓰고 애쓰다 보면 그렇게 글을 쓰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p34

 

손끝으로 일하는 사람은 사랑하다 엎어지고 넘어져도 글을 쓴다. 사람을 너무 사랑해서 주위가 온통 짝사랑투성이지만, 글을 쓰며 자신은 단단해진다. 농부의 손과 300원짜리 자판기 커피는 아주 사소하지만, 그 속에 담긴 삶을 쓰면 글은 사람 전부가 된다.

 

그 끝이 어디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흔도 넘고 여든도 넘은 나이가 됐을 땐, 일 앞에서 여유롭고, 다 비웠으나 모든 것이 가득 차 보이는 여유를 가진 나를 만나길 바란다. 그래서 나는 버티는 중이고, 끝까지 버텨보려 한다. p85

봄 들판의 복사꽃을 보면 꽃의 매혹보다 나뭇가지에 얼굴 긁혀가며 전지 작업을 하느라 주름마다 햇볕의 그을음이 내려앉은 얼굴이 먼저 떠오르고, 꺾이지 말고 과실 잘 붙들고 있으라고 가지마다 줄을 동여매는 농부의 꺼끌하니 뭉툭한 손끝이 먼저 떠오른다. p89

여전히 나에게 삶은 세밀해서 징글징글하다. 꽃, 바람, 하늘처럼 세상에 아름다운 것은 공짜로 널리고 널렸지만, 300원짜리 자판기 커피와 박카스가 오가는 삶이 더 눈에 들어온다. p93

 

세상 모든 이들의 쓸모 있는 조각을 사랑해서, 그 징글징글한 삶을 사랑해서, 버티며 쓰는 글을 읽는다. 정말 ‘괜찮은’ 사람이 버틴다. 정해져 있지 않으니 버틴다는 말은 세상 모든 프리랜서와 비정규직들의 처연한 절규이자, 선언이기에 숭고하기까지 하다.

일하는, 노조 하는 언니들은 어쩌다 내 오랜 아픈 손가락이 되어 버렸나.

​그러니 괜찮다. 우리, 이미 참 괜찮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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