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병역거부 문제가 널리 알려지는 데는 인권, 평화단체들의 역할이 컸습니다. 평화인권연대, 인권운동사랑방,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등 36개 시민단체는 2002년 2월 4일 기자회견을 갖고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실현과 대체복무제도 개선을 위한 연대회의(이하 연대회의)’를 정식으로 발족했습니다. 이후 연대회의는 법률 지원 및 대체복무제도 개선을 위한 활동, 병역거부자 및 병역거부를 고민하는 젊은이들에 대한 상담활동, 병역거부권과 대체복무제도의 의의를 알리기 위한 각종 간담회, 토론회, 기고 등의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반세기 넘게 알려지지 않았던 병역거부 문제가 새로운 사회적 이슈로 등장하였습니다. 사회적 대안으로 대체복무제도를 도입하려는 노력도 진행되었습니다. 앞서 대체복무제를 시행한 해외 사례를 연구하였으며, 당시 대체복무를 도입한 대만 현지조사를 거쳐 대체복무제도가 한국에서도 충분히 적용 가능한 제도임을 알려내고 국회 입법을 촉구하는 활동을 벌였습니다.

평화재건이란 명목으로 한국 자이툰 부대가 이라크에 파병되었고 이를 계기로 반전운동, 파병 반대 운동이 확산되었습니다. 병역거부자들도 각종 집회, 농성, 단식, 문화제, 이라크반전평화팀 등 다양한 활동을 했는데, 특히 파병 반대를 이유로 현역 군인 강철민 이병이 휴가 중 복귀를 거부하면서 병역거부의 새로운 흐름이 등장했습니다. 당시 평화주의 병역거부자들은 진정한 평화재건을 원한다면 파병부대를 철수하고 민간평화봉사단을 파견해야 하며 자신들의 기꺼이 그 대열에 동참할 의사가 있음을 밝히는 기자회견도 했습니다.

연대회의의 등장은 운동의 외연을 확장하고 캠페인을 더 체계적으로 펼쳐 나갈 수 있게 했습니다. 사람들은 현재의 상황과 국가 정책이 보편적 가치에 위배된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2003년 3월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병역거부자 개인의 인권에 초점을 맞췄던 병역거부 캠페인이 반전운동의 색깔 분명히 하게 띄는 계기가 되었으며 2003년 5월 정치적 병역거부자들의 네트워크인 전쟁없는세상의 결성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라크 전쟁과 한국군 파병은 평화활동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고, 양심의 자유를 넘어서 전쟁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병역거부운동에 대한 고민이 전쟁없는세상 창립으로 이어졌다.

강철민 이병은 2003년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을 보고 병역거부를 결심하고 휴가를 나온 후 부대에 복귀하지 않았습니다. 강철민은 자신의 요구사항을 더 널리 알리고 관철시키기 위해 기자회견 직후 기독교회관 708호에서 철야농성을 시작하였고 일주일쯤 후 체포되습니다. 이후 강철민은 군사법정에서 실형 2년, 항소심에서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육군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마산교도소로 이감되었으며 2005년 2월 28일 3.1절 특사로 가석방 출소했습니다.

2008년 5월, 이길준 이경은 징병되었지만 전경으로 차출되어 이명박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 내용에 대한 반대 촛불시위의 시위대를 진압하는 임무를 맡았고 몇 번의 시위 진압 업무에 동원된 후 역시 휴가를 나와 병역거부 의사를 밝히고 복귀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이길준 역시 강철민처럼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협상과 전경제도 폐지를 요구하며 신월동성당에서 철야농성에 들어갔습니다. 이길준은 이후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후 2009년 겨울에 출소했습니다.

병역거부의 역사는 여기까지이고요, 타임라인으로 병역거부운동을 정리해 보면 운동은 2001년 말 평화인권연대라는 단체가 처음 시작을 했고요, 병역거부운동 중 특히 대체복무제도 도입과 관련한 캠페인은 우산 조직이었던 연대회의가 이끌었는데 위에서 설명드린 것처럼 2002년 초에 출범하였습니다. 전쟁없는세상은 2003년 출범했고요. 워낙 센세이셔널한 주제여서 엄청나게 많은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덕분에 저는 그 시기를 제 인생에서 가장 바빴던 시기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2004년 5월 서울남부지방 법원에서 최초로 병역거부자에 대한 무죄 선고가 나오기 전까지 4년간 연대회의는 많은 활동을 했고 여러 가지 성과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병역거부자들에 대해 기존 3년이던 징역을 1년 6개월로 줄였고 1년 2개월~3개월이 지나면 가석방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병역거부 수감자들에게 허용되지 않았던 종교집회를 허용하게 하는 등 다양한 성과들을 거뒀습니다. 그러한 성과들이 쌓여 첫 무죄 선고라는 쾌거를 이뤄낸 것이죠. 물론 검사가 항소를 해서 결국 그 무죄를 선고받은 병역거부자는 감옥에 갔어야 했지만요. 하지만 그것은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국가인권위원회, 유엔 등에서 병역거부자들에게 호의적인 각종 권고가 잇달아 나왔습니다.

그런 활동과 조금씩의 진전이 쌓이고 쌓여 마침내 2007년 정부에서 병역거부자들을 더 이상 감옥에 보내지 않고 대체복무제를 하게 하겠다는 발표를 했습니다. 저희는 뛸 듯이 기뻤죠. 그 즈음에 전쟁없는세상은 두 번째 캠페인인 무기거래감시 캠페인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병역거부운동이 일정 성과도 있었고 무기거래감시가 평상시 한국의 군사주의에 저항하기 위해 전쟁없는세상에서 반드시 다뤄야 하는 주제라는 합의들이 암묵적으로 있어왔었거든요. 또 1세대 정치적 병역거부자들이 출소하고 전쟁없는세상이 상당히 활기를 띠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또 제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비치지 않으려는 전쟁없는세상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병역거부를 할 자격이 주어지는 남성 병역거부자들에게만 계속 사회적 시선이 집중되는 것도 일종의 군사주의라고 생각을 했었기 때문에 남성 이외의 다른 주체들이 활발히 활동할 수 있는 다른 캠페인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해왔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정부에서 보수정부로 정권이 바뀌면서 대체복무제 도입 계획을 백지화해버린 것이었어요. 그 이후로 상당 기간 동안 전쟁없는세상은 침체기를 겪었습니다. 물론 그 시기에도 쉴 새 없이 여러 활동을 했지만 큰 목표 의식이나 기쁨 없이 필요에 의해 행사를 치르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우리는 무기력했고 절망감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때 ‘사회운동설계(Movement Action Plan, 이하 MAP)’라는 워크숍을 하게 되었는데 이 워크숍이 침체기를 극복하는 출발점이었습니다. 오늘은 MAP을 설명하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간단히만 말씀드리면 이것은 사회운동을 평가하고 조직하기 위한 툴입니다. MAP은 일반적으로 몇 년 혹은 수십 년에 걸쳐 진행되는 사회운동의 8가지 단계와 각 단계에서 활동가들의 역할을 설명하고 있어요. 병역거부운동으로 오랫동안 연대를 해온 외국의 트레이너를 초청해서 2012년 3월 이틀에 걸쳐 이 워크숍을 진행하였습니다. 결과는 꽤 좋았어요. 전쟁없는세상의 많은 활동가들이 서로를 더 잘 이해하게 되었고 다시 활동을 시작할 동력을 얻게 되었다는 평가가 대다수였습니다. 또 운동을 더 장기적인 호흡으로 바라보고 조급해 하지 않게 되었다고 평가했어요.

병역거부운동에만 매몰되어서 괴로워하던 우리들은 워크숍 이후 합의를 거쳐 조직을 정비하고 군사주의에 저항하는 다양한 전략을 채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MAP 트레이닝을 한글로 번역하고 좀 손질을 해서 한국의 다른 여러 비슷한 상황에 놓인 단체에도 도움을 주기 시작한 것을 계기로 비폭력 트레이닝을 개발하고 제공하기 시작했고요. 병역거부에만 너무 매몰되는 것이 전략적으로 좋지 않다고 판단해 제주해군기지 건설 저지 투쟁에도 적극적으로 결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또 한국에는 다양한 무기박람회들이 개최되는데 그 무기박람회들이 현대에는 무기 거래의 중심이거든요. 그것에 반대하는 활동도 시작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 영국의 활동가로부터 메일을 한 통 받았어요. 그녀는 바레인에 한국산 최루탄이 수출되어 그곳의 민주화운동을 탄압한다며 연대를 요청했습니다. 우리는 급히 회의를 소집해서 진행하고 있던 일들 중 몇몇을 중단하고 곧장 관련한 캠페인에 뛰어들었습니다. 모금도 하고 바레인 활동가들도 초청을 하고 온·오프라인 액션도 조직했지요.

 

방한한 바레인 워치 활동가와 함께 한국산 최루탄의 바레인 수출 중단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국회에서 진행했다.
방한한 바레인 워치 활동가와 함께 한국산 최루탄의 바레인 수출 중단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국회에서 진행했다.

그리고 이 캠페인은 성공을 거뒀습니다. 정부가 바레인으로의 최루탄 수출을 금지한 것입니다. 이 캠페인의 성공에는 여러 요인이 있을 수 있는데 먼저 바레인 사람들에 대한 한국인들의 동정심을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최루탄은 한국의 민주화에서 상징적인 것입니다. 제도적 민주화를 이끌어냈던 1987년 민주화운동은 이한열 열사가 경찰의 최루탄에 사망을 한 사건이 크게 작용한 것이죠. 그래서 이제는 한국의 시위 진압에서는 사용되지 않는 최루탄을 계속 생산하는 것도 모자라 30년 전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비슷한 바레인의 시위에서 사용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다른 성공 요인들이 더 있지만 길어질 수 있어 여기서 정리하겠습니다. 아무튼 이 성공이 동력이 되어 이후 터키로의 최루탄 수출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무기박람회에 대한 저항, 경찰무기 수출에 대한 저항 등 무기거래감시캠페인이 점점 전쟁없는세상의 주요 캠페인으로 자리를 잡아가면서 병역거부캠페인에도 중요한 모멘텀들이 있었습니다. 긍정적인 변화들이 다시 생기기 시작한 것은 여기에는 적지 않았지만 2016년부터였습니다. 가장 주목할 만한 변화는 사법부 쪽에서 나왔습니다. 2016년부터 4~5년간 1심 법원에서만 무죄판결이 50여 건이 넘게 쏟아져 나왔고 2016년과 2018년 두 차례 고등법원에서도 1심의 결정을 뒤집고 병역거부자들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2004년과 2011년 두 차례에 걸쳐 병역법 조항이 정당하다고 판단을 내렸었던 헌법재판소가 결국 2018년 현행 병역법 조항이 헌법에 불합치 한다는 결정을 내리게 만들었습니다. 헌법재판소는 결정문에서 현행법 조항의 효력은 2019년 12월 31일까지 한시적으로 유지되기 때문에 그 이전에 국회는 입법을 통해 대체복무제를 마련해야 한다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에는 대법원에서도 병역거부자에 대한 무죄 선고가 있었습니다. 헌법재판소의 결정과 대법원의 무죄 선고 이후 감옥에 갇힌 병역거부자들은 모두 석방되었습니다.

결국 국회는 대체복무 입법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15개의 법안이 앞다투어 상정되었고 그중에는 복무 기간 5년을 주장한 법안도 있었습니다. 생산적인 논의로 각 법안별 시각차를 줄이는 과정은 시도조차 되지 않았어요. 결국 여야는 시간만 끌다가 헌법재판소가 정해준 시점이 끝나가는 2019년 12월 27일, 교도소 등의 교정시설에서 현역병 복무 기간의 2배인 3년간 합숙근무를 하는 안을 여야 합의로 통과시켰습니다. 이는 교정시설로만 대체복무 영역을 국한시키지 않았던 국방부의 안보다도 더 후퇴한 법안으로 병역거부운동진영의 거센 비판을 받았습니다. 덕분에 저희는 국가인권위원회가 주는 대한민국인권상도 수상하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에는 한국에 난민을 신청하러 온 러시아 병역거부자들을 지원하는 활동도 시작을 하였습니다. 작년에는 여기 이치가와 선생님, 신현오 선생님도 참석하신 20주년 행사들을 진행했고요 비전워크숍을 통해 다음 20년 준비도 마쳤습니다.

오늘 심포지움의 주제인 젠더와 연결해서 조금 더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원래 전쟁없는세상 앞에는 ‘병역거부자들과 그 후원인들의 모임’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습니다. 사실 이 설명에는 어떤 젠더도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한국 사회에서 누가 군대에 갈 수 있는지 아는 사람이라면 이 설명이 지극히 젠더적이라고 느끼실 겁니다. 그만큼 전쟁없는세상이 20년 전 병역거부운동을 처음 시작할 때는 젠더 문제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병역거부에서 젠더 분석이 빠지면 그 운동은 마초적이고 영웅적인 남성성을 상징하는 병역거부자와 그들을 지지하는 비남성 활동가들이 감옥에 가는 병역거부자들에게 대체복무제도를 만들어주는 운동으로 좁아지게 됩니다. 그리고 대중적으로는 전쟁에 대한 저항자보다는 착하고 예의 바른 국가폭력 피해자 이미지, 그리고 그 옆에서 눈물짓는 후원자들의 이미지로 박제됩니다. 전쟁없는세상의 활동가들이 책으론 페미니즘을 많이 접했을지 모르겠지만 사실 초창기 운동에서는 이 문제의식을 잘 녹여내고 있지 못했던 것입니다. 언제 이 타이틀이 사라졌는지, 사라지게 했는지 기억이 정확히 나지는 않지만 오랫동안 사용했던 것은 아니라고 기억합니다.

운동의 역사를 연표로 설명드리면서 전쟁없는세상의 활동 영역을 확장하는 이 논의 과정에는 우리의 병역거부운동이 의도치는 않았지만 병역거부 당사자(국가에 의해 군 복무 의무를 부여받은 남성)가 아닌 다른 활동가들을 소외시키는 측면이 있었고 특히 여성활동가들의 역할을 병역거부자 개인의 고난을 극대화하기 위해 뒤에서 조용히 눈물짓는 지지자의 역할로만 비치게 했다는 내부적인 평가가 있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평가 이후 저희는 단체의 기본적인 골격 속에서 평화수감자들을 지원하는 활동을 여성활동가들 대신 출소한 병역거부자들이 맡는다든지 여성주의 세미나나 워크숍을 시작한다든지 병역거부운동 여성활동가 인터뷰집을 발간한다든지 하는, 젠더의식을 전쟁없는세상의 활동에 흡수하려는 크고 작은 시도들을 했습니다. 어떤 시도는 성공적이었고 어떤 시도는 실패했습니다.

 

2010년 병역거부자의 날 행사로 치러진 ‘남성의 평화 여성의 평화’ 수다회 또한 젠더의식을 활동으로 풀어내려는 노력이었다.
2010년 병역거부자의 날 행사로 치러진 ‘남성의 평화 여성의 평화’ 수다회 또한 젠더의식을 활동으로 풀어내려는 노력이었다.

이것은 결국 병역거부운동은 원래는 군사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이지만 동시에 불복종하는 당사자가 주목받을 수밖에 없는 운동의 방식이라 반군사주의의 다른 이슈, 즉 징집대상자가 아닌 다양한 실천자를 포괄할 수 있는 캠페인이 필요하다는 취지의 논의로 이어졌습니다. 현재 전쟁없는세상의 두 번째 캠페인인 무기거래감시캠페인은 거의 예외 없이 비남성들이 주도하고 있습니다. 물론 남성들은 소외시키는 것은 아니지만 병역거부자들은 감옥에서 출소한 뒤 원래 자기가 활동하던 분야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리고 병역거부캠페인도 여성병역거부자(징병되는 것은 아니지만 나 역시도 전쟁을 일으키는 군사주의를 거부하는 병역거부자다!), 완전거부자 등 어떤 식으로 건 군대와 군사주의에 부역하는 것을 거부하는 주체들을 포괄하는 병역거부 아닌 전쟁거부자캠페인으로 캠페인을 확장하기로 했습니다.

말이 길어졌는데요 아무튼 제가 하려고 하는 얘기는 전쟁없는세상이 젠더 관점을 이해하고 운동에 녹이기 시작하면서 병역거부자들의 인권을 지지하는 운동에서, 물론 이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더 확장된 운동으로 변신이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대체복무제 도입 캠페인을 이어가면서도 선택적 병역거부, 완전 거부, 여성병역거부 등 다양한 형태의 병역거부에 대해 말하고 군대 내 채식 선택권, LGBTI 군인을 처벌하는 군형법 92조의6 폐지운동에도 참여했습니다. 또 군사주의의 또 다른 기둥인 무기거래감시 캠페인을 전쟁없는세상의 새로운 캠페인으로 결정했고 평택 미군기지 확장이전 반대운동, 제주해군기지반대운동, 양심을 획일화하고 맹목적 충성을 강요하는 국기에 대한 맹세와 경례 반대 캠페인, 어린이·청소년 대상 전쟁교육인 군 나라사랑교육에 대한 반대 캠페인 등으로 활동을 확장했습니다.

만약 평화운동이 젠더 관점을 장착하지 못하면 군대에서 여군을 모집하기 위해 많은 자원을 투자하는 일도, 군대에서 채식을 허용하는 일도, 군대가 퀴어프렌들리 해지는 것도, 무기회사들이 친환경탄약이나 탄소 배출 없는 장갑차 등을 만드는 행위도 마냥 칭찬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젠더 관점을 통할 때만이 우리는 반군사주의의 맥락에서 전쟁과 군대, 전쟁 준비의 문제점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글 _ 최정민 전쟁없는세상 활동가

 

- 최정민 활동가가 일본 교토 여자대학교 특강에서 발표한 내용 중 일부입니다. 한국 병역거부의 역사를 설명한 강연 전반부는 한국에는 이미 관련 자료가 많기 때문에 삭제했고, 일부 표현은 한국 독자들에 맞게 수정했습니다. 전쟁없는세상 주


※ 이 글은 병역거부, 반전평화운동 단체 ‘전쟁없는 세상’ 블로그에 최초 게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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