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발령지가 바뀌었다. 사는 집에서 차로 40분, 좀 밟으면 30분 걸리는 곳으로. 아내의 출퇴근이 부담스러운 상황. 고민 끝에 첫째와 둘째의 초등학교와 어린이집을 바뀐 곳으로 옮기고, 차 뒷자리를 방처럼 꾸미고는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다섯 달 동안 그렇게 했다(그 과정동안 이사 준비를). 아침잠 많은 나에게 매일 아침이 전쟁이었다.밥 차려 먹고, 애들 준비 시키고, 이 짐 저 짐 둘러메고, 아직 자는 둘째 둘러메고, 둘러메다보니 가끔 빠뜨리는 둘째 신발도 챙기고, 아내가 자주 빠뜨리는 안경 스마트폰 열쇠도 챙기고, 내가 가끔 빠뜨리는 아내도 챙기고 차를 출발시켰다.출발하고 나면 가족여행 기분이 났다. 아이들은 뒤에서 좀 놀다가 다시 잠들곤 했다. 아내 출근, 첫째 등교, 둘째 '등원'하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 매국을 하면 3대가 떵떵거리고 산다.”이는 우리 근대사의 상처를 환기해 주는, 굳이 확인하고 싶지 않은 우리 사회의 속설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이 해묵은 상처를 헤집는 현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우리 사회의 기득권층의 대부분은 그 연원을 거슬러 오르면 친일 부역의 역사를 만나게 된다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을 만큼.정치인들 가운데서도 친일파 출신의 선친이나 조부 덕분에 논란이 된 이들도 적지 않다. 가까이는 2015년, 선친인 김용주 전 전남방직 회장의 평전을 냈다가 해묵은 친일 논란에 휩싸인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현 바른정당)가 있다. 기득권층의 연원, 친일 부역의 역사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밝힌 김용주의 친일 행적에 따
착한사람내가 보기엔...착한 사람의 눈에는,안착한 사람이 ‘착한 척’ 하는 게 잘 보이고,안착한 사람의 눈에는,착한 사람이 ‘착한 척 하는 사람’으로 보인다.그러니까 자기 자신한테 달려있다.내가 보기엔... 매일 새롭다첫째는 자기 다리를 아빠 다리에 척 올려놓으면 잘 잔다. 둘째는 아빠가 등을 솔솔 긁어주면 잘 잔다. 그래서 오늘도 이쪽에 오른쪽 다리를 내어주고, 저쪽에 왼손으로 솔솔 긁어 모두모두 꿈나라로 갔다. 나도 꿈나라로 가야겠다.요즘은 아침을 같이 맞이하고, 어두워지면 같이 하루를 마무리하는데 그 맛이 달콤하다. 얼마나 더 그러겠어... 그런 생각 가끔 하는데, 꼬맹이들 시절이 보기 좋고 고마울 따름이다. 아주 나중에는 지금을 떠올리며
그예 ‘박근혜 없는 봄’이 왔습니다. 안방에서 텔레비전을 시청하다가 헌법재판소장 대행 이정미 헌법재판관의, 감정이 실리지 않은 담담한 어조의 주문 선고를 듣는 순간,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같은 시간에 기쁨과 감격으로 겨워하며 환호한 이들은 전국에 또 얼마였겠습니까.박근혜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이 타오른 지 133일 만이었습니다. 박근혜가 파면됨으로써 그동안 열아홉 차례나 촛불을 밝힌 수고로움은 넉넉히 보상을 받았을 터입니다. 광장에서 새로운 민주주의를 창조해 낸 시민의 탄생은 박근혜 권력의 바탕이었던 ‘박정희 신화’의 퇴조로 봐도 무방할 듯합니다.그날, 후배 교사와 함께 선배 한 분을 모시고 가볍게 소주를 한잔 했습니다. 혹시 우리처럼 박근혜 파면을 자축하는 모임이 있나 살펴봤지만
내용을 입력하세요. 1944년 오늘(3월 13일), 민족해방운동가 김마리아(1891~1944) 가 해방을 1년여 앞두고 감기지 않는 눈을 감았다. 향년 52세. 두 차례의 투옥 중에 받은 고문 후유증이 그의 숨을 거두어 갔다. 여성교육이 전무했던 시절, 일본과 미국에서 공부하고 독신으로 독립운동과 민족 교육, 여권 신장을 위해 헌신한 이 담대한 여성은 수저 한 벌만 유품으로 남겼다.“일본 사람들이 나를 얼마나 고문했는지, 물과 고춧가루를 코에 넣고 가마에 말아서 때리고 머리를 못 쓰게 해야 이런 운동을 안 한다고 시멘트 바닥에 구둣발로 머리를 차고… 그러나 내 정신은 똑똑해서 ‘너희가 할대로 다해라. 그러나 내 속에 품은 내 민족 내 나라 사랑하는 이 생명만은 너희가 못
‘대동세상’을 꿈꾼 동학교조 최제우, 형장에서 지다 내용을 입력하세요. 1864년 오늘(3월 10일) 오후 2시, 대구 남문 밖 아미산 아래 관덕당 뜰에서 동학의 교조 수운(水雲) 최제우(1824∼1864)가 참수되었다. 죄목은 ‘사도난정(邪道亂正)’, ‘서양의 요사한 가르침을 그대로 옮겨 이름만 동학으로 바꾸고 세상을 헷갈리게 하고 어지럽힌 죄’였다. 1860년 4월 깨달음을 얻고 동학의 가르침을 시작한 뒤 불과 4년 만에 그는 불꽃같은 삶을 형장에서 마감했다. 향년 40세. 1863년 12월에 체포되어 다리뼈가 부서지는 혹독한 고문을 이겨낸 뒤였다. 두 눈을 부릅
만화가 김수박 / 뉴스풀협동조합 조합원 / [아날로그맨], [오늘까지만 사랑해], [내가 살던 용산](공저), [삼성에 없는 단 한 가지 : 사람 냄새], [만화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 출간
심판, 응징(1)심판! 같이 노력하는 곳에서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가 심판을 보기 시작한다. 노력하던 나머지 사람들이 몹시 곤란해진다. 심판 봐달라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말이야. 같이 노력하는 곳에서는 자기 몫을 하려는 자세가 중요하다. 부부사이에도 이런 현상은 흔하다.응징! 전체에게 좋지 않게 될 것을 알면서도 반드시 상대를 응징해야 된다고 판단한다. 그 결과가 본인 개인에게도 손해라도 기꺼이 무릅쓴다. 구성원 모두가 이러한 개인적 정의를 따르면 전체가 망한다. 부부사이에 흔하다. ‘너만 돈쓰란 법 있냐? 나도 쓸란다.’ 심보(2)남이 기쁘면 즐거운 사람이 있고,남이 아프면 즐거운 사람이 있다.후자의 마음이 놀부 심보이겠는데, 그들은 자신의 심보가남에게 잘 보인
3·1만세운동은 특정 날짜로 이름이 붙긴 했지만 실제로 장장 두 달여에 걸쳐 전국 방방곡곡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이었다. 국내는 물론 만주 지역에까지 번져나간 이 전 민족적 항일운동의 총 시위 횟수는 2천 회 이상, 참여자는 연인원 2백만 이상으로 추산되고 있다. '모든 계층'이 참여한 민족운동 조선총독부의 공식 기록에도 집회에 참여한 인원은 106만여 명이고, 그 중 사망자가 7,509명, 구속자는 4만 7천여 명이었다. 만세운동을 준비하고 주도한 인물은 민족대표 33인이었지만 각 지역으로 확산된 만세시위 운동의 주력은 무명의 민중들이었다.3월 1일부터 4월 11일까지는 매일 10회 이상 시위가 일어났으며, 시위운동의 정점을 이룬 4월 1일에는 모두 67회의 시위가 일어났다.
박유하의 가 출간되었을 때는 나는 이 책의 제목을 이루고 있는 ‘제국(帝國)’이라는 낱말에 강한 거부감을 느꼈다. 그것이 국민 개개인이 가치의 근원체라고 믿는 천황에 대한 자기 동일시를 기반으로 하는 절대주의 천황제와 가족주의 국가관을 특징으로 하는 파시즘으로서의 ‘제국주의’를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왜 하필이면 '제국'의 위안부일까왜 저자 박유하는 책의 제목으로 ‘일본(일본군)’이라는 가치중립적인 명칭 대신에 ‘제국’이라는 어휘를 선택했을까. 저자는 “조선인 위안부가 일본인 위안부와 일본군과의 관계에서 동일한 위치”에 있으며, “전쟁 수행에 협력하는 ‘애국’적 존재로, 일본군과 ‘동지적 관계’에 있고 스스로도 ‘동지의식’을 갖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나는 저자가 선택한 ‘제국’
지난 2월 11일 5시 30분부터 구미역 광장에서 스물두 번째 촛불이 켜졌다. 서울은 ‘15차 범국민행동의 날’인데 구미 촛불이 스물두 번째가 되는 이유는 8월 26일부터 시작된 ‘한반도 사드배치 반대 구미시민 촛불문화제’가 7차례에 걸쳐 먼저 베풀어졌기 때문이다.시민이 지킨 스물두 번째 촛불매운 날씨에도 역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백여 명 남짓이다. 42만 인구를 기준으로 하면 보잘 것 없는 숫자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한파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뜻으로 나온 이들이다. 김천사드대책위에서 보내주었다는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오리털 파카를 꼭꼭 여민 시민들의 열기도 만만찮았다.추위에도 불구하고 집회는 얼마간 고양된 가운데 계속되었다. 사회자는 남유진 시장이 오늘 ‘탄핵 기각 서울 집회’에
어제 오후에는 흔한 낮달이 떴다. 파란 하늘 가운데 하얗게 박혀있었고 반달보다 조금 컸다. 믿기 어려운 얘기지만, 다 큰 사람도 그것을 ‘해’라고 우기는 경우가 있다. 아주 옛날에 중학생이던 사촌누나가 그것을 해라고 했었다.나는 어린 마음에 '과학 시간에 낮달이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그 과목을 포기했나? 아니면 국어시간에 배운 시적 표현인가?' 싶어서 다시 물어보았지만, 누나는 이렇게 말했다."아니, 무슨 훤한 낮에 달이 뜨냐?" 저거라고 가리키려고 했더니, 하필 낮달이 보일 때 해는 저쪽 산 뒤로 넘어가 있다. 아주 잠깐 이렇게도 생각했었다. 누나가 미쳤나? 그러나 곰곰이 살피니 누나는 진심이었고, 우리는 코스모스 밭까지 가던 논둑을 다시 걸었다.둘 다 지방 사람인 아내와 나는 서울에
꽁다리수육의 비계가 제일 맛있다. 물론 삼겹살에도 비계가 제일 맛있다. 김치랑 같이 먹으면 조화롭다. 치킨을 시켜 먹으면 예전엔 불편했지만, 요즘은 목과 날개 부분이 제일 맛있다. 닭다리의 손잡이 부분도 좋지. 여름에 삼계탕 먹을 적엔 닭껍질도 먹을 만했다.껍질 하니 생각나네. 고등어구이의 껍질이 또 그렇게 맛있다. 고동색의 등 부분도 조금 떫은맛이 점점 더 좋아지더라. 딸기는 빨간 부분보다 잎 손잡이 달린 하얀 부분이 몸에는 더 좋을 것 같이 느껴진다. 수박도 하얀 부분에 가까운 쪽이 더 좋아.김밥하면 꽁다리지. 한 입 넣으면 입안에 가득. 꽁다리 하니 또 생각나는 게 피자 꽁다리! 가운데 치즈가 안 들어 있어도 담백하니 좋다. 점점 더 담백한 게 좋은가봐. 식빵 껍질도 예전엔 싫었지
'고맙다'와 '감사하다' 사이엔 뜻 차이도, 위계도 없다어느 인터넷신문에서 의 손석희가 ‘감사합니다’ 대신 ‘고맙습니다’를 쓴다는 점을 가리키며 “‘고맙다’는 말 쓰는 것이 건방진 게 아니라는 점 인식할 필요 있다”고 환기해 주었다. [관련 기사 : 손석희는 왜 “감사합니다” 말고 “고맙습니다”를 쓸까]나도 고마움의 인사는 ‘고맙습니다.’로 한다. 의례적인 자리에서도 마찬가지다. 행사를 진행할 때도, 여럿을 대표해 인사를 할 때도 ‘고맙습니다’만 쓴다.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다. ‘고맙다’보다 ‘감사하다’가 더 격식적인 성격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옛날부터 허쉬파피 워커를 좋아했다. 요즘은 허쉬파피 매장이 점점 줄어드는 것 같아 아쉽지만, 대형마트 젤 안쪽에 찾아보면 꼭 한 군데씩 자리하고 있다.이 워커는 2010년 말쯤에 산 것 같다. 나는 운동화가 없다. 그때부터 주구장창 신고 다녀서 지금은 낡디 낡았다. 물론 경조사 등의 정장을 입어야 하는 경우에 착용하는 검정 구두가 하나 있다. 9년 전인가, 10년 전인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데-아참! 결혼이란 걸 했었지-그날 하루 ‘필요’해서 산 검정구두를 지금도 쓰고 있다. 신을 일이 잘 없어서 지금도 멀쩡하다. 게다가 경찰이신 처갓집 삼촌들이 경찰용 검정구두를 나랑 발이 맞다고 두 켤레나 주셨기에, 그것들을 모두 신으려면 앞으로 20년 쯤 더 걸릴 것 같다.또한 매년 여름에는 저 워커가 잠
'경상북도 구미'하면 '박정희(1917~1979)'를 떠올리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긴 하다. 시내 상모동에서 태어나서 만주군 장교를 거쳐 해방 뒤 쿠데타로 집권한 그 덕분에 오늘의 구미가 만들어진 건 부정할 수 없으니 말이다. '선산군 구미면'은 그가 이 고을에 공업단지를 유치하면서 '선산읍'을 거느린 인구 40만이 넘는 '구미시'가 되었다. 그는 개발독재를 통하여 근대화를 추진했고, 유례없는 고도성장을 구가함으로써 구국의 지도자로 기려진다. 18년 독재 끝에 비명에 갔지만 그는 지역에서 가히 '반신반인'으로까지 숭앙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는 지금 경상북도 기념물 제86호로 지정되어 성역화된 상모동 생가 부근에 세운 5미터 크기의 청동상으로 살아 있다. 박정희의 상모동, 혹은 왕산 허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