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대나물 꽃. 사진 박성숙
광대나물 꽃. 사진 박성숙

 

계절이 바뀌었습니다. 3월하고도 6일 ‘경칩’이자 보름입니다. 천문의 지혜를 알 턱이 없는 촌부가 경칩과 보름이 한 날에 겹치는 것에 묘하게 끌려 평소 소회를 적어봅니다.

지난가을 놀고 있는 빈 땅을 차마 그냥 둘 수 없어 복합비료 두 포대와 함께 이삭이 예쁘게 패는 우리 밀을 뿌렸습니다. 종자 이름이 흑진주를 떠오르게 하는 ‘아리진흑’의 싹들이 봄을 맞아 제법 기운을 차려 500여 평 되는 밭에 푸른 기운이 겨우내 메말랐던 대지를 도포하고 있습니다. 자두 농사를 짓는 시골 농부의 엉뚱한 푼수 짓에 경운기를 몰고 지나던 노인 회장님은 돈 안 되는 일을 한다면서 지청구를 하십니다. 한편으로는 회장님의 부인을 통해 노루, 고라니 밭이 될 것이라는 염려도 전해 줍니다. 지난겨울 초입 가뭄에 시달리는 밀밭에 스프링클러로 물도 두어 차례 주었습니다. 저는 밀 이삭이 보현골 바람을 타고 조용히 파도치듯 한 풍경을 만들어 주기를 기다려 봅니다. 농부를 국토의 정원사라고 합니다. 농업의 다원적 기능입니다. 그렇다고 저 자신이 산야를 아름답게 꾸민다는 의식은 없습니다. 그저 가슴 한쪽이 따뜻해 지길 기대해 보면서 하는 일입니다.

당대(唐代)의 선사인 ‘한산寒山’의 시 중에 이러한 구가 있습니다.

 

풀잎마다 이슬이 맺히고

바람이 한결같은 양상으로 소나무를 울리는데

여기 길을 잃고 헤매고 있나니

내 몸이 나의 그림자에게 어디로 가야 할지를 묻네

泣露千般草 吟風一樣松 此時迷徑處 形問影何從

(읍로천반초 음풍일양송 차시미경처 형문영하종)

 

보름달이 휘영청한 밤에는 달을 보면서 저도 몸이 저의 그림자에게 내가 어디로 가는지를 묻곤 해봅니다.

시내와 가까운 산야에는 이르게 산수유가 노란 꽃망울을 터뜨렸습니다만 비교적 해발이 높은 보현골에는 아직 집 마당의 ‘운룡매(雲龍梅)’만 한두 송이 하얀 꽃망울을 터뜨릴 뿐, 멀리서 논밭 경지를 정리하는 트랙터 소리만 들릴 뿐입니다.

 

꽃망울을 터뜨린 산수유 나무. 사진 박성숙
꽃망울을 터뜨린 산수유 나무. 사진 박성숙

 

제가 ‘절기’를 챙기고 음력 개념의 ‘삭망’을 즉 보름과 그믐을 자연스럽게 챙기는 것을 보니 부지불식간에 촌부가 된 모양입니다.

수택의 흔적이 묻은 황현산 선생의 『사소한 부탁』에 나오는 산문 ‘두 개의 시간’에는 사실상 양력에 해당하는 24절기가 책력에는 지극히 합리적으로 배열되었지만, 달력의 기본은 월과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농사는 절기에 따라 짓고 제사는 날짜에 따라 지내며, 양력에는 공식적인 삶이 있지만 음력에는 내밀한 삶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바닷가 사람들의 삶은 썰물과 밀물의 영향이 그들에 시간에 더 보태져 있다고 설파하였습니다. 그들의 시간 리듬은 썰물과 밀물에 연결되어 있고 그 리듬은 달의 숨결이며 우주의 ‘율려(律呂)’라고 말하였습니다.

조금과 사리의 영향을 표면적으로는 받지 않는 보현산 동쪽의 산골 농부는 하늘의 달을 보면서 은근하게 주위 친구들에게 총각무 김치 같은 소박한 찬에 농주 한 잔, 거친 다식과 보이 차 한 잔을 달 구경과 함께 하자며 유혹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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