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전생을 묘사한 설화인 《본생담(本生譚)》 중에 생명의 무게는 미물이나 부처나 한 치 다른 것 없다고 하였습니다.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두어 달 전 집 나갔다 돌아온 생명인 ‘경래’ 때문에 종종 생각에 빠져봅니다. 나와 사무실에 삼 년 넘어 동거한 수컷고양이로 경찰서 하수구에 빠진 것을 데리고 왔다고 ‘警來’라고 부르는 그 녀석이 창가 블라인드 두세 치 되는 틈에 수시로 올라가 바깥세상을 보며 묵상에 잠겨 있는 것입니다.

 

사진 정헌호
사진 정헌호

지난여름 가출했을 때의 짝을 그리는 것인지, 스스로 돌아다닐 수 있는 바깥공기를 그리워하는 것인지, 내가 느끼는 안쓰러움이 정도를 넘습니다. ‘경래’를 야생으로 풀어 준다면 다시는 못 돌아올 세상으로 갈 것입니다. 며칠의 자유는 얻겠지만 인간들이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며 살고 있는 도시환경에 적응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영역 다툼에 능숙한 길고양이들의 공격도 신경이 쓰입니다. 문명의 이기인 자동차에 의한 로드킬도 염려가 됩니다. 반려견, 반려묘가 같이 지내는 세상이라도 낯선 생명을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존재로 여기는 일부 물리력을 가진 존재들로부터 학대를 당할 것이 너무나 명확하게 눈에 보입니다. 지난번 가출 때에는 나는 ‘생명’이라는 입장에서 정성을 다해 전단지를 붙이고 애를 쓴 결과 5일 만에 ‘경래’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2층 사무실에만 둔다면 제 목숨이야 부지하겠지만 자유의 바깥세상을 그리는 그 처연함을 보는 내가 불편합니다. ‘경래’의 입장이 아니라 순전히 나의 입장일지도 모릅니다.

자연이라는 생태계에 최선의 방법으로 어울려 살아가는 인디언들의 입장에서 보면 저의 오지랖은 그저 헛웃음 거리일 수도 있습니다.

“인디언 언어에는 ‘야생’이란 말이 없습니다. 그들이 가진 단어 중 ‘야생’에 가장 가까운 것이 ‘자유’다”라고 설파하였습니다.

“야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삶만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경래의 ‘자유’를 생각하다가 연상이 되는 사회 현상이 있습니다. 국민의 생명, 국가의 주권을 외면하고 일본의 ‘후쿠시마 핵오염수’ 방류에 동조하고 자국의 세금을 들여 홍보까지 하는 대통령이라고 칭하기도 어쭙잖은 윤석열과 그를 추종하는 무리가 입에 달고 다니는 것이 “힘을 바탕으로 하는 자유”입니다. 그들이 참으로 졸렬합니다. 어찌하여 국민의 생명을 포함한 생태의 아픔을 공감하지 못한다는 말입니까? 며칠 전 9.23기후정의 행사에 들렀다가 용산 대통령실 부근에 걸려있던 ‘국군의 날’ 행사 관련 현수막이 생각납니다. 거기에는 “힘을 바탕으로 하는 평화”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서글픔이 가을 햇살 아래 걸려있었습니다.

 

아메리카 인디언 『세네카족』의 격언입니다.

‘눈에 눈물이 없으면 그 영혼에는 무지개가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3년하고도 반년이 더 남았습니다. 늦었지만 제발 철이 들기를 기대해 봅니다.

 

※ ‘경래’의 무료함과 처연함을 달래 줄 방법으로 갓 태어난 새끼 고양이를 한 마리 입양하기로 했습니다. 어미로부터 젖떼기를 기다립니다. 두 달이 걸린다고 합니다.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시애틀 추장 외. P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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