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이 지난 2월은 새내기 농부에겐 한없이 한가한 계절이다. 곧 봄이 오겠지만 겨울 끝자락 해발 350미터의 보현골 날씨는 제법 두툼한 솜바지를 입어도 흠칫흠칫 몸이 떨린다. 매서운 겨울 끝자락에 가스통을 잘라 만든 나무 난로 옆에서 농부는 시집에 빠졌다.

 

영천을 한없이 사랑하는 이중기 시인의 시집이다.

벌겋게 달군 난로 옆에 앉아 뜨거운 차를 홀짝이는 내 몸이야 무람없이 한가하다만, 마음은 시집을 읽는 내내 불편함을 감출 수가 없다.

영천 이야기다.

밥 한 끼가 간절한 민중의 피와 땀을 가로챈 권력자와 그 하수인인 친일 관리의 포악함, 가죽풍구*란 별명을 가진 오 만석지기 이인석의 탐욕, “영천 인간들/ 내 땅 한 자취 밟지 않고는/ 선 자리에서 백 걸음도 갈 수 없다”고 시에서는 말한다.

해방된 나라의 왜곡된 풍경이다. 점령군 하지를 필두로 한 외세의 몰염치, 이에 항거한 1946년 영천 시월농민항쟁으로부터 지금까지의 뒤틀린 현대사를 서사시로 기록한 시집이다.

시인은 시의 내용 팔 할이 픽션이라 말하지만, 그 팔 할이 논픽션임을 증거하는 520여 명의 희생자 위령탑이 세워져 있다.

 “요인 암살에 방화 혐의”로 숨진 “아홉 살 정이뿐”, 그리고

 

나락 베다 끌려간 늙은 아버지

혼인날 받아 놓았던 더벅머리 육손이

칙간에 앉았다가 머리채 잡혀 나간 아낙

빨갱이 씨라고 맞아 죽은 중학생

배고픈 넋들

술 한 잔,

곡소리 한 상 받아 보지 못한

저 서러운 넋들

 

‘서러운 넋들’을 위로하는 위령탑이 자호천을 바라보며, 캠핑족들이 떠들며 술병을 비워내는 모습을 보며 서 있다. 노래방 기계음이 밤새 흘러나오는 펜션촌 한쪽 폐가의 감나무처럼 서 있다.

시(詩)에서는 제주 4.3의 원적이 영천 시월항쟁이라던데, 제주 4.3평화공원의 엄숙함과 애잔함은 영천 시월항쟁 터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시인은 시집 발문에서 말한다. “시인은 1946년 영천시월항쟁에 대해 이야기를 해왔다. 옛날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질곡의 세월에 인두질로, 총질로, 칼질로, 가슴 저 밑바닥 끝없는 심연에 두려움으로 각인되어 세상을 향해 입 떼기를 꺼리는 민중들을 대신하여 이중기 시인은 애증의 눈으로 오늘까지의 현실을 비통함을 실어 시어로 툭툭 던지고 있다.

 

겨울 농부는 시집을 읽고 또 읽는다.

<현종인 옹**>이라는 시가 유독 작금의 시절에 겹쳐진다.

 

나, 사표쓸라네

여든 넘어 그 무슨 뚱딴지 사표라뇨?

궁민사표!

절룩절룩, 아홉 번쯤 홀짝거려야 소주 한잔 간신히 비워내는 현종인 옹, 살얼음판 현대사 뒷골목만 밟았던 영감

자작나무 흰 눈썹이 꿈틀,

.....

시드니 아들네로 간다고 국민사표 던진다는 늙은이

 

2022년 3월 9일 이후 보현골 농부는 “궁민사표를 쓴다.”라고 하지 않아야 할 것인데…. 아! 절절한 염원.

 

불의의 세월을 애써 외면하는 민초의 틈바구니에 끼인 겨울 농부는 서설이라도 내리길 기대하며 북쪽 하늘을 바라보고 또 바라본다. 나무 난로에는 복숭아 폐목이 벌겋게 타고 흐린 하늘에서 난데없이 우박이 떨어진다.

 


*가죽풍구: 곡물에 섞인 쭉정이, 겨, 먼지 따위를 날려서 제거하는 데 쓰이는 농기구. 한쪽에 큰 바람구멍이 있고, 북처럼 생긴 내부에 여러 개의 넓은 깃이 달린 바퀴가 있어, 이것을 돌리면 바람이 일어난다. 여기서 가죽풍구는 내부의 깃을 가죽으로 만들어 소작농들이 소작료로 가지고 온 벼를 알곡까지 바람으로 날려 소작인들에게 착취의 멍에를 씌우는 것을 풍자해서 나온 말이다.
**현종인 옹: 이중기 시인이 해방 전후사 영천의 상황을 채록하는 데 도움을 준 분이라고 시집에서는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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