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당 풍경. 사진 박혁수
서당 풍경. 사진 박혁수

 

‘용’에게 밥을 주다.

제가 매주 수요일 저녁 다니는 서당은 한 번씩 툭툭 알밤이 저절로 떨어지듯 기발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곳입니다. 시대의 이야기꾼 <조용헌>의 ‘기’ ‘용’ ‘도’ 이야기 등은 책으로만 접할 수 있는 간접경험이라 상상력이 떨어지는 제게는 재미에 한계를 느낍니다. 그러나 서당에서의 이야기는 시대의 이야기꾼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현장성이 있는 것이라 가슴이 더 두근거리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오늘은 그중 제가 들은 것을 하나 먼저 꺼내보겠습니다.

저와 같이 글을 배우는 도반으로 붓을 잡은 지 20여 년이 넘은 분이 계십니다. 지방 소도시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서 일주일에 이삼일 정도 진료를 합니다. 그 진료일 중에서도 하루 진료 시간을 시중 한의원의 반 정도만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하루는 수업 중 뜬금없이 ‘용’ 이 화제에 올랐습니다.

그분이 그 ‘용’ 이야기를 주도적으로 하는 바람에 이후 ‘드래건○’라는 별호가 생겼습니다. (개인정보보호 차원에서 그분의 성을 ○로 표시합니다) 주위 도반들이 장난스럽게 붙인 것이기도 합니다.

 

 

노자를 만난 공자가 그를 용(龍)이라 했다.

노자가 어느 쪽을 바라보고 있는지를 알지 못했다고 했다.

노자의 시선은 바로 유목(游目)이다.

공자의 시선은 세상만사 주목(注目)을 하고 주자학에 이르러서는 더 심해졌다고 한다.

- 이어령, <눈물 한 방울>, 김영사

 

이어령 선생의 글처럼 고차원적인 이야기를 하다가 나온 ‘용’ 이야기는 아닙니다.

드래건○가 젊었을 때 선무도와 태극권을 수련한다며, 여러 군데 절을 다니다가 들은 이야기라고 하면서도 꼭 자기 이야기를 하듯 합니다. 천간(天干)과 지지(地支) 이야기를 하다가 뜬금없이 그분의 허물없는 친구분에게 물어봅니다.

“지지에 나오는 상징 동물들은 모두 우리 인간과 같은 환경에서 호흡을 하는 실재의 생명체인데 왜 ‘용’만 아니지?”

그 친구분 그냥 우물쭈물하십니다. 드래건○가 씩 웃으시면서 하는 이야기.

“‘용’은 상상의 동물이 아닌 실재 존재하는 동물이다. 일반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뿐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올라간 도력 있는 스님들이나 선무도 고수들에게는 그 ‘용’이 보인다.”

 

그 ‘용’은 사실 ‘기’의 집합체라고 합니다. 선무도 도장이나 오래된 사찰의 도량에서는 일부러 ‘용’을 몇 마리씩 키우기도 한답니다. 그 말에 허물없는 친구분이나 저같이 서당 공부 10년 차로 짬밥이 모자라는 도반이 미심쩍은 눈빛으로 실없는 말 한다는 눈치를 보이니 “심지어 그 ‘용’에게 밥을 준다.”고 눙치기도 합니다.

“어떻게 ‘용’에게 밥을 줍니까?”

온몸의 기를 모아 글을 쓴다고 합니다.

밥 식(食) 자를요.

그 밥 식자에 기(氣)가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키우는 용들을 불러다가 식자가 쓰인 종이를 태워서 밥을 준답니다. 제가 보기에 드래건○가 그 기를 모아쓰기에 조금의 기력이 딸려서 글을 더 배우러 온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아마 그 고래 등 같은 기와집에 황룡, 청룡, 이무기, 익룡 등 여러 마리의 용을 키우는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서당 선생님은 이 이야기를 듣고는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하실 뿐입니다.

 

요즘 제가 적절한 ‘용’ 밥을 못 준 탓인지 ‘용’띠인 집사람이 내뿜는 ‘용’입의 불꽃에 내상을 입은 탓인지 오십견의 통증은 더 심해지고, 없었던 이명과 난청 현상까지 발생하는 것을 보니 고래 등 같은 기와집, ‘용’을 키우는 기와집에 가서 진맥이라도 받아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세상사에는 빈칸이 있어야 재미가 있는 모양입니다. 이어령 선생이 다음과 같이 말씀을 하셨지요.

 

 

사이는 너와 나 사이의 빈칸이다.

내가 너에게 가지 않고 네가 나에게 오지 않고 이 빈칸에서 만나는 것이다.

한가운데 그 사이에서 만나려면 힘이 든다.

너도 나도 아닌 그 사이에 네가 있고 내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 이어령, <눈물 한 방울>,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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