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3년까지 살 수 있다면 그 후로는 불멸 영생도 가능하다고 한다. 과학기술의 기하급수적인 발전 덕분이다. 100세 시대, 120세 시대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방송언론, 유튜브에서는 기후 위기를 이야기한다. 기후 위기 정도가 아니라 지구의 생존, 인류의 생존을 거론할 정도다. 올여름엔 81일 동안 비만 온다 하고 엘니뇨가 폭염도 부른다고 한다. 며칠 전에 온도가 30도가 넘자 당장 오늘을 걱정하는 인간에게 인류세人類世를 거론하는 이러한 시기의 불멸 영생 이야기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불멸 영생과 인류의 절멸이라는 거대한 모순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현대인들이다. 그 모순은 거기에만 있지 않다. 인간과 자연이 서로 일으키는 모순이 눈에 띄게 나타나고 있다.

왜 이렇게 인간과 자연의 물질대사에 커다란 구멍이 생기고 인간의 역사와 자연의 역사가 엇박자를 놓게 된 것일까? 온실가스의 일종인 이산화탄소를 뿜어낸 화석연료가 그 주된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무엇보다 자본주의의 창세기라고 할 수 있는 산업혁명 이후 그때부터 지금까지 어느 정도의 이산화탄소가 배출됐는지는 가늠할 길이 없다. 하지만 현재 통계학상 화석연료로 인한 이산화탄소는 매년 약 400억 톤 정도 배출되고 대기 중에 매년 190억 톤을 축적하고 있다. 이 양자의 차인 210억 톤은 해양과 육상 식물이 흡수한다. 그런데 여기서 역설이 생긴다. 바다가 이산화탄소를 흡수해 주지만, 물에 녹은 이산화탄소 탓에 바다가 탄산수로 변하고 이 때문에 바다의 생태계는 무너져가고 있다. 이뿐일까. 의류 생산은 매년 400만 톤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며 이것은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의 8%를 차지하고 항공기의 온실가스 배출량보다 더 많다고 한다. 1개의 청바지가 탄소를 33kg 배출한다고 한다. 디지털 기업이 지구 전체 온실가스 배출량의 약 4%를 차지한다. 이쯤 되면 마르크스가 말한 바대로, 자본의 이윤을 위해 거대하게 집적되는 온갖 상품을 생산하는 자본주의가 주적일 수 있다. 

하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2021년 시점에서 세계 인구는 대략 78억 명으로 추정되고 사람이 하루에 토해내는 이산화탄소를 1kg으로 보고 1년간 전 인류가 토해내는 이산화탄소의 양을 계산하면 약 26억 톤이나 된다. 이 양은 화석연료의 소비 때문에 전 세계로부터 배출(일 년 배출 400억 톤) 되는 이산화탄소량의 약 6%에 상당하는 양이다. 하지만 지구에는 탄소순환체계가 작동한다. 제조업, 디지털 산업, 인간, 동물이 뱉어내는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산소를 뱉어내는 광합성 체계가 존재하는 것이다. 아프리카 대륙과 열대우림에서 흡수하는 이산화탄소의 양은 3억 4,000만 톤이고, 특히 브라질의 열대우림 아마존은 전 지구에서 화석연료를 태워서 나오는 이산화탄소의 1/4을 흡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연구 지역에 있는 99억 개의 나무의 총 탄소 저장량은 0.84Pg (페타그램, 1Pg=10억 톤)에 달했는데, 환산하면 8.4억 톤이 흡수 저장된다. 이산화탄소로 환산하면 22.9억 톤에 해당한다고 한다.

 

 

앞에서 말한 바다처럼 또 하나의 역설은 일일 최고온도가 32.2℃를 넘으면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는 열대우림의 나무가 오히려 저장하고 있던 이산화탄소를 배출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난개발로부터 시작해 온갖 생태계 파괴를 비롯한 자연 파괴가 온실효과를 끌어올리는 것뿐만 아니라 그 자연 자체가 오히려 온실효과를 조장한다니 역설도 이런 역설이 없다. 역설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화석 에너지를 재생에너지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온실가스 배출량이 전 세계 한 해 배출량의 5~6배에 이른다는 연구결과가 나와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뭘까? 기후를 둘러싼 진실게임의 미스터리를 풀기란 쉽지 않다. 지구 전체적으로 이산화탄소와 산소의 양에 대한 재무제표도 작성하기 쉽지 않은 마당에 그 미스터리가 제대로 풀릴 수 있을까? 이러한 역설들은 인간의 역사와 자연의 역사 사이에 선순환이 아니라 악순환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인가, 자본주의의 창세기를 지나 묵시록 단계에 들어선 자연의 역사만 회복하면 해결될 문제인가. 인간이 이산화탄소를 뱉어내고 산소를 흡수하며 나무가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산소를 뱉어내는 물질대사가 유지될 수 있도록, 묻지 마 대규모 벌목을 비롯한 남미와 아프리카의 ‘어마 무시’한 에코 자본주의만 종식시키면 될 일인가? 농업 원시사회로 돌아가면 해결될 문제인가?

인간의 역사와 자연의 역사 사이에 놓인 저 엇박자 놀이나 자연의 역설을 생각하면 오늘날 기후 위기 문제는 참으로 해결 난망하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탄소를 배출하는데 왜 온실가스가 급격히 증가하지 않을까? 향후 수십 년 동안 배출량이 감소하지 않으면 21세기 말까지 기온이 임계 값을 넘어 최대 4도까지 상승할 것이라고도 한다. 1.5도에서 4.0도의 차이는 사소한 것 같지만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은 전혀 다르다. 1.5도의 온도 상승은 가뭄의 빈도를 2.4배, 강수량의 빈도를 1.5배 증가시킨다. 4도에서의 위험은 피해가 약 두 배가 될 것이며,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살 수 없게 되고 대규모 이주도 불가피한, 심각한 경제적 영향을 받는다고 경고한다. 불멸 영생도 가능할 미래를 앞둔 우리가 늘 듣는 공포스러운 이야기다. 이 상태로 간다면 멀고 먼 날 지구는 표면 온도가 섭씨 460도에 달하는 금성처럼 변할 것이다. 생명체가 절멸하는 극단적인 공포의 상황이다. 만약 지구도 금성처럼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 농도가 계속 높아진다면 큰 재앙일 것이지만, 지구에는 앞에서 말한 대로 이를 방지하는 뛰어난 공조 시스템–거대한 탄소순환 시스템-이 있다.

이 거대한 탄소 순환체계 안의 인간은 어떤 존재일까. 혹시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라블레의 소설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에 나오는 주인공들처럼 게걸스럽게 자연을 먹어대며 이산화탄소를 뿜어내는 78억 명의 인간, 그들이 입고 신고 걸치는 온갖 상품은 존재의 알리바이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현장 부재증명을 하지 못하면 처벌받는 것처럼 우리 인간은 인간과 자연의 장대한 물질대사 과정 안에서 존재의 알리바이를 대는 데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말이다. 인간에게는 현장 부재증명을 할 방도가 없다. 이쯤 되면 인간과 자연 사이의 미스터리의 비밀을 풀 열쇠는 결국 인간의 욕망과 탐욕으로 귀결되고 말 듯하다.

불가에 인드라망이라는 용어가 있다. 여러 번 겹친 모습을 한 제석천帝釋天 마냥 인간의 역사와 자연의 역사는 중중重重은커녕, 重重重으로 혹은 그 이상으로 겹쳐져 있어서 그 모습을 풀기가 매우 어렵다. 우주 만물이 보석으로 이루어진 관계의 그물망이고 그 보석들이 서로를 비추며 화엄의 세계를 이루고 있건만 우리 인간은 그 그물을 찢는 데 인생을 허비하고 있다. 인간과 자연이 서로를 비추며 선순환하는 것이 아니라 악순환 일로를 걷고 있다. 화엄불교의 인드라망과 달리 인간과 자연(자본가와 노동자, 남과 여,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미국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쟁…)은 서로를 비추며 상대를 빛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일그러뜨리고 망가뜨리고 뭉개고 있다. 기후 위기 속에 존재의 알리바이를 증명할 길 없는 역설과 모순의 시대에 화엄의 세계는, 과연 가능할까.

(사족: 이산화탄소가 지구 온도 상승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다. 이런 주장에서 기후변화 핑계로 탄소세를 거둬들이는 탄소자본주의의 음모, 이산화탄소로 전 지구적 공포마케팅을 하고 재생에너지 팔고, ‘친환경’ 차 팔고, 미래에 농업을 장악한다는 음모론(?)이 나온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지금 이산화탄소 기근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이산화탄소가 부족하면 호흡곤란, 실신, 저림, 어지럼증이 나타난다고 한다. 필자의 현재 역량으로는 무엇이 진실인지에 대한 판단 여부는 보류한다.)

 

글 _ 이득재 대구가톨릭대학교 러시아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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