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9월 24~25일은 세계기후행동의 날이다. 오늘도 14호 태풍 난마돌이 일본 열도를 휩쓸고 지나가고 또다시 대한민국 포항 등지에 비가 퍼부었다. 2020년 국회 본회의에 ‘기후위기 비상 대응 촉구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스웨덴의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가 유엔에서 기후위기를 경고하고 국내외에서 기자회견이 이루어지고 각종 선언문이 나오고 뜻있는 사람들이 집회를 벌이고 1인 시위를 한다. 12호 태풍 무이파가 자연법칙을 무시하며 발생했다느니, 가을 태풍이 기후변화로 인해 더 자주 발생할 거라느니 방송언론에서 말이 많다. 사막 지역에 폭우가 쏟아지는 장면을 보니 일반인의 눈으로 봐도 기후위기는 심각한 수준으로 보인다. 당장 대구에서는 낙동강 보를 막아 수돗물에서 냄새가 나고 정수기로도 정화가 안 되는 독성물질 녹조가 심각한 수준이다. 기후변화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인류의 문제로 등장했다. 그래서 한 편에서는 인류세(人類世)라는 말이 새로운 담론으로 등장했다. 르네 스텔마 감독은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 세계 여행을 하며 환경운동가, 과학자 등을 만났다. 그래서 만든 영화가 <우리가 알던 세상은 끝났다(Normal Is Over)>다. 여기서 스텔라 감독은 기후변화, 식량 생산 통제, 천연자원 고갈, 소득 불평등과 같은 여러 문제를 다루며,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대응 문제를 탐구한다. 이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탄소 중립 문제, 몬산토 문제, 금융 문제 등은 그다지 새로운 문제를 제시한 것은 아니다.

더 나아가, 기후위기 문제는 기후정의 운동 그 이상을 벗어나지 못한다. 텀블러에 음료를 마시면, 에코백을 들면, 친환경 정책에 투표하면,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면, 과연 기후위기를 막을 수 있을까? 미안하지만, 그러한 노력만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사이토 고헤이는 자기 책 『지속불가능한 자본주의』에서 자본주의를 버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고 말한다. 지속가능하지 않은 발전은 발전이 아니고 탄소 문제 해결하면 기후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사이토 고헤이가 말하듯이 우리가 자본주의의 생산력주의를 벗어나지 않으면 오늘날 기후위기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쓰레기를 분리 수거하고 에코백을 들고 다니면서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다가 지속 불가능한 자본주의를 만날 뿐이다.

문제는 ‘생산’이다. 주지하다시피 마르크스는 생산력 증대가 자연을 훼손하는 진짜 주범이라고 말했다. 에코백을 아무리 친환경적으로 만든다 해도 에코백은 생산품이고 텀블러 또한 생산된 상품이다. 이러한 생산은 넷플릭스 드라마 <작은 아씨들>에서 주인공 김고은이 추자현이 남겨 준 20억으로 사고 싶은 물건들을 사도록 유혹한다. 물론 그 물건에는 사용 가치가 있는 상품들도 있다. 하지만 화폐와 상품이 끝없이 교환되는 자본주의의 생산 시스템이 멈추지 않으면, 우리 인류가 기후위기의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깨닫고 행동한다고 해도, 기후위기는 멈추지 않는다. 기후행동을 한다고 하지만,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수 있는가? 르네 스텔라 감독의 영화에 나오듯이 껌이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해도 껌은 꾸준하게 생산되고 동네 슈퍼로 팔려나가고 GMO 옥수수로 만든 식용유, 각종 과자는 이미 가게, 대형마트를 뒤덮은 지 오래되었다. 인간의 욕망을 잠재울 수 있는 뾰족한 묘안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이마트에, 백화점에, 코스트코에, 이마트에 매일매일 어머 어마한 상품들이 생산되어 쌓이고 쿠팡 등 그 생산품을 유통하는 시스템이 생겨나고 진화하는 한, 기후정의 구호로 환경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마르크스의 유명한 『자본론』 모두에 보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지배적으로 행해지는 사회의 부는 하나의 <거대한 상품 집합>으로 나타난다’고 되어 있다. 이 구절에서 통상 ‘거대한’으로 번역되는 단어의 독일어는 운게호이어(ungeheuer)다. 운게호이어는 전설상의 괴물, 괴수, 잔인하고 극악무도한 사람 등의 뜻이다. 그리스 로마 문화와 독일 낭만주의 문화에 정통해 있던 마르크스는 자기 책 『자본론』에서 신화 속 주인공들에 대해 많이 이야기한다. 운게호이어도 그중의 하나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자본주의는 지하, 지옥에 사는 일종의 괴물이다. 그런데 이 괴물이 지상으로 올라와 무지막지하게 상품들을 쏟아놓고 쌓아놓으면서 세상을 괴물스럽고, 끔찍하며 기괴하고 괴기한 곳으로 변질시켜 놓았다. 겉으로 예쁘고 아름답게 포장된 향수도 원피스도 정장도 마르크스의 눈에는 괴물, 괴수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인간에게 낳고 기른 재액(災厄) 속 화폐의 가치만큼

비도덕적인 재액은 없다. 이것은 밭도 파괴하고

남자들을 안절부절하며 집과 대그릇 가장자리에서 몰아세우는

화폐는 사람에게 가르침을 주고, 법을 아는 남자들의 고귀한 마음을 비틀어

수치스러워해야 할 생업으로 향하게 하며

화폐는 죽어야 할 인간에게 악질적인 교활하고 뻔뻔스러운 꾀를 지시하며

어떠한 모독의 업도 수치스러워하지 않는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대해 더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얼굴이 피투성이인 메두사든, 복수의 여신인 에리니에스든, 지하 어둠의 세상, 지옥에서 활개 치며 살던 신들이 이 지상을 올라와 지배하고 있는 곳이 자본주의사회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흔하디흔한 물건 – 상품들로 넘쳐나는 기괴한 곳이다. 유전자 조작된 포메이토를 생각해 보자. 감자와 토마토가 같이 열리고 엉뚱한 위치에서 감자가 열린다. 그로테스크하다. 이번 폭우로 물에 잠긴 포스코는 제철철강 공장을 뜻하는 외눈 괴물 키클롭스의 상징이다. 이 괴물들이 사회를 사회적 공장으로 진화 발전시키고 상품들을 쏟아낸다.

<우리가 알던 세상은 끝났다>라는 다큐 영화에도 나오는 말이지만, 녹색성장이라는 단어, 얼마나 허황된 말인가. 영화 속 이야기처럼 성장은 한계에 도달했다. 그런데도 아직도 녹색성장이니 지속가능한 발전이니 ESG 경영 이야기를 한다. 2100년에 식량 생산이 그때 인구 90억은커녕 몇십억 인구밖에 먹여 살리지 못한다고 영화는 이야기한다. 경제성장이 지속가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확하게 말해 자본주의의 생산력주의가 멈추지 않으면 몇 십억 인구밖에 먹여 살리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더 심각한 상황이 올 수 있다. 생산된 물건은 없어도 살 수 있지만 먹을 것이 없으면 살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런데도 자본주의는 메타버스라고 하면서 사이버공간으로 자본주의의 생산력주의를 확산시킬 태세다. ESG 경영처럼 자연을 망쳐놓고 해체된 자연환경을 자본주의의 성장 동력으로 삼으려고 한다. 4차 산업혁명도 같은 맥락 속의 이야기다.

지금처럼 생산력주의가 용인되고 자본주의라는 괴물의 입에서 전 지구적으로 수많은 상품이 쏟아져 나오는 한, 그래서 착한 기업이 아니면 소비자가 상품 구매를 적게 한다는 말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처럼 자본가가 초과이윤을 착취하기 위해 공장을 돌리는 한, 기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자본주의에는 지속가능한 비상구가 없기 때문이다.

글 _ 이득재 대구가톨릭대학교 러시아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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