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욕심이 많은 내게 알라딘 중고서점은 큰 매력이다. 대구에 알라딘 중고서점이 세 곳 있는데, 최근에 생긴 동대구점에 내가 찾는 책이 제일 많은 것으로 조회되었다. 그래서 이곳을 찾았다.

서점은 신세계백화점 건물 내에 있다. 지하 4층 주차장에 파킹하고 엘리베이터를 타려는데 엘리베이터 입구나 안에도 알라딘 중고서적의 위치에 관한 안내가 전혀 없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 건물 내에서 알라딘 중고서점의 존재감은 동네 구멍가게에 불과한 수준이었다. 같이 엘리베이터를 탄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알라딘 서점이 어디 있는지 몰랐다. 할 수 없이 내 힘으로 찾아야만 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스마트폰으로 어렵사리 서점의 위치를 알아냈다. 지하 1층이었다. 다시 엘리베이터를 탔지만, 또 다른 문제에 봉착했다. 이 엘리베이터는 지하 4층에서 9층까지인가 운행되는데, 지하 1층부터 4층까지는 그냥 통과하고 5층부터만 내릴 수 있는 구조였다. 할 수 없이 5층에서 내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다시 내려가야만 했다.

5층에서 내리니 그곳의 분위기는 나 같은 촌놈은 압도되는 별천지였다. 말로만 듣던 명품관이란 곳이었다. 곳곳에 명품 매장이 즐비했는데 외국어 낱말에 대한 감각이 있다고 자부하는 나로서도 읽기조차 어려운 생경한 이름의 메이커 상품들이 휘황찬란하게 고급스러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하지만 나의 관심은 오직 알라딘 중고책방이 어디 있는가 하는 것뿐이다.

근사하게 차려 입고 매장 앞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직원에게 미안함과 쪽팔림을 무릅쓰고 “알라딘 중고서적 가기 위해 에스컬레이터를 타려 하는데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물었다. 그분은 무슨 매장 옆에 있으니 그쪽으로 가보라 하는데, 메이커 이름이 생전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다. 제스처로 방향을 알려주면 좋으련만 그냥 음성언어로만 정보를 제공하니, 흡사 토익 듣기 평가처럼 낱말을 기억했다가 5지 선다 문제 풀 듯이 비슷한 이름의 간판을 찾아야 했다. 지금 그 이름을 완전히 까먹었는데, 특이하게 V자가 U로 발음되는 이름(Pravda처럼)인 것을 알고 간판을 찾아냈다. 그나마 외국어에 대한 이 정도의 센스가 있었기에 덜 헤매고 찾아갈 수 있었지만, 이 별천지를 빠져나가면서 착잡한 기분을 떨치기 어려웠다.

 

 

에스컬레이터가 있는 곳까지 거리가 제법 되었는데 그게 전부가 아니다. 5층에서 1층까지 에스컬레이터로 내려간 뒤에 다시 지하 1층으로 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기 위해 또 한참을 걸어가야 했다. 더구나 내 손에는 알라딘에 팔 20권 정도의 책이 담긴 상자가 들려 있었다.

여느 때라면 내가 원하는 책들을 손에 넣고 집으로 향할 때는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분이 좋기 마련이지만, 이날은 그렇지 않았다. 돈 몇 푼 아끼기 위해 인터넷으로 새 책을 사지 않고 헌책을 사러 이곳에 왔건만, 지하 1층에서 5층까지 갔다가 다시 지하 1층으로 내려가는 과정에서 겪은 일들이 너무 씁쓸했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만인이 평등하지 않은 이곳에서 자유의 실체를 뼈저리게 체험했다.

이 우울한 기분의 요체는 문화충격(cultural shock)과 계급 폭력(class violence)으로 상징되는 것이었다. 그 많은 명품 메이커 가운데 나는 왜 ‘루이뷔똥’밖에 모를까? 세상에는 내가 이름조차 모르는 명품들이 그렇게 많을까? 도대체 그 비싼 명품들을 어떤 사람들이 소비하는 것일까? 선량한 시민에게 박탈감을 안기는 점에서 이런 귀족적인 상거래 문화는 폭력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성실히 땀 흘려 일하는 정상적인 근로 대중이 이런 곳을 드나들 일이 없다. 이곳은 유한계급의 허황한 물욕을 채우기 위해 오만하게 세워진 현대판 베르사유 궁전이다.

웃기는 것은 이곳을 찾는 상당수의 사람은 나보다 소득이 낮은 이들이라는 것이다. 루이 16세 시대와 달리 자본주의라는 계급사회에서는 일반 백성들에게도 베르사유 궁전의 출입이 허락되는 점이 특이한데, 혹자는 이를 자유민주주의라 일컫는다. 소득이나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자유롭게 명품관을 드나들 수 있다. 실컷 구경한 다음 물건을 사고 안 사고의 자유도 개인의 몫이니, 열렬한 자유 신봉자인 멸공 회장님이 만든 이곳은 이름 그대로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다.

그러나! 이 천민자본주의의 총아는 지극히 교활한 술수로 선량한 사람들을 유혹하여 명품에 대한 소유욕의 늪에 빠져들게 하는 점에서 겉으로는 자유를 표방할 뿐 실제로는 강제로 대중을 길들이는 괴물일 뿐이다. 사실을 말하면, 나는 오늘 이 괴물의 아가리 속에 들어갔다 나왔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서 4층은 그냥 통과하고 5층 명품관에 내려놓음으로써 사람들을 이 괴물의 아가리에 던져 넣는 것이다.

이 상업 전략은 두 가지 면에서 근사한 목적을 노린다. 하나는 명품관 이용객들에게 베르사유로 직행하는 하이패스로서 일종의 특권 의식을 선사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나처럼 본의 아니게 괴물의 아가리에 던져진 고객을 명품에 길들여 나중에 이곳을 다시 찾도록 만드는 것이다. 30대의 가장이 자기 아내와 함께 얼떨결에 이곳에 던져졌을 때,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심리적 기류가 형성될 것인지 생각해 보라.

몇 년 전에 아파트 선거관리위원장을 맡아 자치회장 선거 일로 투표함을 들고 세대를 방문한 적이 있다. 내가 사는 곳은 전형적인 서민 아파트인데, 가장 적은 평수의 집에서도 명품 가방 같은 것이 쉽게 눈에 띄는 것에 크게 놀란 적이 있다. 우리 집은 부자는 아니지만 나와 아내가 부부 교사이기에 먹고사는 데 큰 걱정을 하지는 않는 편이다. 그럼에도 우리 집식구들 가운데 아내는 물론 대학을 다니는 두 딸도 명품 따위를 구매한 적이 없다. 그런데 우리 애 말로는 자기 주변에 명품 하나 걸치지 않은 학생을 볼 수 없다고 한다. 그 아이들이 전부 부잣집 자식들이고 우리가 가난해서 그런 것일까?

편의점에서 알바 해서 먹을 것 아껴 가며 번 1년 치 수입을 털어 명품 백 구입하는 게 정상적인 삶일까? 한 달에 200만 원 할부 끊어 포르쉐 구입한 뒤 컵라면으로 허기를 채우는 카푸어의 심리가 정상일까?

그 누구도 이런 삶을 강요하진 않았다. 이것은 다 개인이 선택한 자유의 결과처럼 보인다. 그렇지 않다. 겉으로 그렇게 보일 뿐 실상은 자유가 아닌 반강제에 의해 그런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개인이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할 수밖에 없게끔 강제하는 그 괴물의 이름은 천민자본주의다. 이 괴물을 만나기 전에는 편의점 알바생도 포르쉐 카푸어도 모두 멀쩡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며칠 전에 식탁에서 이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리 딸에게 들은 이야기로 글을 맺으련다.

명품 옷을 들어도 태가 나지 않는 아이가 있는 반면, 값싼 옷을 입어도 태가 나는 아이가 있어. 아빠 나는 후자와 같은 스타일을 추구할 거야. 그런데 이런 건 있어. 뭐냐 하면, 회사에 취직해서 이를테면 거래처 사람을 만나러 간다 할 때, 명품 하나 걸치지 않고 소박한 차림으로 가면 그 사원과 회사에 대한 신뢰가 반감될 거라는 거야.

이런 글을 쓰는 소신쟁이인 나 역시도 그런 형편에 처한다면 명품 구입을 고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선택은 결코 나의 자유가 아니다. 굶어 죽을 자유가 자유가 아니듯이 이런 선택은 자유라 할 수 없다. 우리 모두는 ‘멋진 신세계’에 포섭되어 자본가들이 유도하는 방향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노예들이다.



글 _ 구미 사곡초 교사 이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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