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것은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다. 오랜만에 서울 강남에 다녀왔다. 선입견인지 몰라도 낯설었다. 찻길 대로마다 자라 등 옷 파는 가게가 즐비하고 뒤편 골목길에는 노래방에 바에 유흥주점들이 건물마다 빼곡하게 들어서 있다. 병원은 왜 이리 많은지. 후줄근한 건물들이 많고 산천초목에 싸여 있고 작은 하천이 흐르는 하양 촌에 오랫동안 살아서일까. 멀리서 바라보면 거대한 성곽 같은 아파트들이 줄지어 서 있다. 골목길을 걸으며 날씨가 무더웠던지 강남은 내 옷에 맞지 않는 뭔가 낯선 곳으로 다가왔다. 숲에서 살아야 할 사마귀가 아파트 담벼락 위에 붙어 있는 것을 우연히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란 적이 있다. 멀리서 볼 때는 얼굴이 잘 안 보여 놀랄 일이 없지만 누군가가 내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 때 놀란 경험을 하는 것도 그렇다. 누군가의 얼굴이 나를 압도할 때 우리는 두려움과 공포를 느낀다. 복잡해진 서울의 지하철을 헤매기도 하고 지하철 칸이 대구의 지하철 칸보다 널찍하다는 느낌도 들어온다.

30년 동안 대구에 살면서 서울 출신인 나는 과거를 상실했다. 한글로 물 볕이라 일컬어지는 하양(河陽)은 나에게 어느새 친숙한 공간이 되어 있었다. 버스를 타고 가며 눈앞에 펼쳐지는 팔공산의 웅장한 산자락들과 포도밭들은 나에게 익숙한 공간이 되었던 것이다. 대로변에 애처롭게 서 있는 나무들과 높은 건물들에 짓눌린 작은 관목들, 길바닥을 뒤덮은 담배꽁초들의 풍경은 그다지 다른 것이 없는데 높은 건물들이 대로변을 수놓고 있는 강남은 낯섬 그 자체였다. 나는 과거만이 아니라 친숙함, 친밀함을 잃어버렸다. 아니 이제는 무엇이 친근하고 친밀한 것인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워졌다. 한때 친근했을 서울도 이제는 낯선 공간으로 변해 친밀했던 과거를 과거 속으로 보내버리고 말았다.

도시 풍경만이 그러랴. 코로나19도 낯선 경험이고 그래서 우리는 공포를 느낀다. 느끼는 정도가 아니라 공포 그 자체다. ‘마기꾼’이라는 신조어도 낯선 단어다. 공식적으로 길거리에서 마스크를 벗어도 된다고 하지만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공포에 짓눌렸는지 모두들 마스크를 쓰고 다닌다. 마스크를 쓰지 않고 강남을 플라뇌르(flaneur, 산보하는 사람)처럼 어슬렁대며 걷는 나는 코가 삐죽 튀어나온 마스크 쓴 사람들을 보며 새의 부리가 생각났다. ‘완전히 새 됐어’라는 노래도 있지만 나는 길거리에서 낯선 새들이 밀려가고 밀려오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혹시 내가 저들에게 낯선 존재가 아닐까.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나를 혐오하고 바이러스를 방출하는 괴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마스크를 쓰지 않은 나를 흘낏 보며 인상 쓴 채 스쳐가는 저 사람은 아마도 나를 바이러스 취급했을 터이다.

 

밥솥에 덜 된 밥 마냥 설익은 쌀이 입안에서 서걱거리듯 강남만이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은 공포, 낯섦,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다. 주가가 폭락하는 공포, 높은 인플레이션의 공포, 원숭이 두창 공포증, 지도자를 잘못 만나 전쟁에 죽어 나가는 우크라이나 사람들, 곡물 가격 폭등으로 식량 자급률이 37%인 일본에서 사람들이 쌀, 계란, 절인 무를 배급받는다는 이야기, 우리도 일본처럼 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 IMF를 한바탕 겪은 한국처럼 국가 부도난 스리랑카 등 우리는 지금 어느새 괴물처럼 다가와 내 코앞에 들이민 얼굴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초유의 낯선 경험들을 줄지어 하고 있는 중이다.

얼마나 낯설까. 넷플릭스 드라마든 영화든 말쑥하게 옷 차려입은 배우들의 외양, 산뜻하게 하얀색으로 꾸민 매장 안, 화려한 옷들 입고 강남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에게 후줄근하게 땀으로 범벅된 노동자들의 겉모습은 얼마나 낯설게 다가올까. 양복 입은 회사원들에게 붉은 머리띠 매고 구호 외치는 노동자들은 또 얼마나 낯선 존재들일까. 0.3평의 스스로 용접해 제작한 철제 감옥에서 지금도 파업 투쟁을 벌이고 있는 유최안 노동자의 모습은 우연히 발견해 놀란 가슴 쓸어내리게 하는 사마귀 같은, 아니 괴물 같은 것으로 비치는 것이 아닐까. 도시 어두운 골목길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사람을 소스라치게 만드는 괴물 같은 존재, 낯설고 너무나 낯설어 손사래 치며 멀리하고 싶은 존재 아닐까. 어렸을 적 공부 안 하면 공돌이나 버스안내양을 비하해 부르던 차순이 된다는 말을 귀에 딱지 앉도록 들으며 자란 탓일까. 한국 사회 전체가 휴거 사회인지 모두들 공돌이 공순이 나락에 떨어지지 않으려고 법대 가 판검사 되고 의사 되려고 의대만 있으면 너나 할 것 없이 강원도 산골에도 자식을 보낸다. 유최안 노동자는 하청노동자다. 하청, 얼마나 모멸스럽고 치욕스러우며 낯설고 공포 섞인 단어인가. 자본주의는 공포를 조장하는 시스템이다. 우리는 그 공포마케팅에 익숙해 있다. 한국 사회가 사회적 공동묘지로 변했지만 우리는 밤하늘 교회지붕을 수놓은 붉은 십자가들이 공동묘지를 상기시키는지도 모르고 자본주의적인 교환가치의 세상에 불쑥불쑥 발을 담근다. 그리고 익숙해져 가고 나락에 떨어질까 봐 겁에 질려 아등바등하며 살아간다.

우리는 언제쯤 친밀한 곳을 찾을 수 있을까. 낯설어도 낯설지 않고 두렵지 않은 세상, 언제쯤 가능할까. <우리들의 블루스>에 나오는 별이도 다정하게 안아줄 수 있는 세상, 혐오와 공포가 지배하고 세상을 낯설게 만들어 두려움의 대상으로 만드는 곳 이런 세상 말고, 나락으로 떨어질까 봐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 가능하기는 할까?

 

글 _ 이득재 대구가톨릭대학교 러시아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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