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조직쟁의실장이 아닌 방영환 열사가 생전에 친했던 사람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2020년경 하반기 저는 발전노조 해고자로, 열사는 택시 해고자로 서로 만났습니다. 아마도 서로 해고자가 아니었으면 그냥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었을 겁니다.

열사는 마지막까지 참 힘들게 살았습니다. 어렸을 때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안 해본 일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못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열사는 동훈그룹 내 민주노총 소속 노동조합을 처음 만들었다고 엄청 자랑스러워했습니다.

해성운수는 그때부터 열사에 대해 엄청난 모멸과 탄압을 퍼부었습니다. 그러나 열사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힘차게 현장을 조직했습니다. 하지만 해성운수는 불법 부당한 근로계약서를 거부했다고 막무가내로 해고를 했습니다. 열사는 자신도 힘겨운 상황임에도 해고 기간 수많은 곳에 연대투쟁을 다녔습니다. 연대투쟁은 열사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한번은 생활고 때문에 세탁공장에서 알바를 했다고 합니다. 공장에 CCTV가 있어서 1분도 쉴 수 없고, 너무 힘드니까 한 달을 버티는 사람이 없을 정도인데 자신은 3개월이나 버텼다고 자랑을 하더군요. 동네에서 폐지를 줍는 어르신에게 호주머니를 탈탈 털어 드리면서 고생하지 마시고 들어가라고 할 정도로 남을 먼저 배려하는 성격이었습니다. 언제나 궂은일 마다 않고 먼저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열사는 월급도 없지만 노조 서울본부 투쟁연대국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동지가 열사를 그렇게 따뜻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부당해고를 당하고 33개월 만에 당당히 복직하는 날 제가 건넨 축하 꽃다발을 받고 열사는 너무나 행복해 보였습니다. 복직하는 날 열사는 또다시 전쟁터로 들어가지만 힘차게 투쟁하겠다는 결의를 밝히기도 했습니다. 해성운수는 부당해고 기간 임금을 지급하지 않고 법대로 하라며 또다시 열사를 생활고로 내몰았습니다. 하루는 압류서류에 인감도장을 찍어야 하는데 도장 팔 돈이 없다며 전화가 왔었습니다. 열사가 스마트카드사 압류 절차를 밟고서야 4~5개월 만에 임금 미지급분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열사가 1인시위를 할 때 사 측의 온갖 모욕과 욕설이 난무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열사는 묵묵히 완전월급제 이행과, 임금체불과 착취를 중단하라고 당당히 요구했습니다. 같이 새벽까지 술 마시고 열사 집에서 잘 때도 힘들다는 내색을 잘하지 않았습니다. 지속된 사 측의 폭행과 모욕, 명예훼손과 집회 방해, 특수협박 등 아무도 모르게 열사는 점점 지쳐갔나 봅니다. 지쳐가는 열사를 먼저 헤아렸어야 했습니다.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이 너무 후회스럽습니다. 희원 씨에게 몇 번이고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열사대책위를 꾸리고 모두가 끈질기게 투쟁했습니다. 정승오도 구속시켰습니다. 열사가 생전에 제기했던 많은 것들이 불법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저는 악마 같은 정부길 일가를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혼자 당신을 대신해서 1인시위를 이어갔습니다. 악마들의 사과는 이제는 필요 없습니다.

방영환 동지,

동지의 우렁찬 목소리가 듣고 싶습니다. 동지의 웃는 모습이 보고 싶습니다.

방영환 동지, 먼 훗날 우리 다시 만납시다. 그래서 함께 신명 나게 연대투쟁하고 여행도 같이 가게요.

 

- 친구 남성화가

 

2024. 2. 26




※ 고 방영환 열사 빈소를 차린 서울대학교병윈 장례식장에서 지난 2월 26일 추모문화제가 열렸다. 남성화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조직쟁의실장이 추모문화제에서 낭독한 편지글을 이곳에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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