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당 조봉암과 통합진보당 이석기(1)
진보당 조봉암과 통합진보당 이석기(1)
  • 강철민
  • 승인 2022.04.04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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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24일, 통합진보당 이석기 전 의원이 가석방되었다.

박근혜 정권 시절 내란음모 조작 사건으로 감옥에 갇힌 지 8년 3개월 만에 일이었다. 촛불 혁명으로 당선된 문재인 정부는 임기 말 가석방으로 그를 풀어주었다. 그리고 같은 날 박근혜 전 대통령을 사면, 복권하였다. 

“과연 공정과 정의란 것이 존재하는가” 이석기 전 의원이 감옥 문을 나서면서 한 말이 떠오른다.

아무런 영향력이 없는 새로운 정치세력은 기득권 세력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정치세력이 원내에 진출하고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에 위협이 된다면 기득권 세력은 그들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 언론, 사법부, 정보기관 등을 동원하여 철저하게 탄압한다. 독재자들은 자신들에게 저항하는 자들이 어떻게 되는지 본보기를 만든다. 감히 덤벼들 꿈도 꾸지 못하게 한다.

63년 전 이승만 독재정권에 저항하고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한국사회를 바꾸고자 한 사람이 있었다. 죽산 조봉암 선생이다. 이승만 독재정권에 의해 간첩으로 몰려 사법살인 당한 진보당 조봉암 선생과 박근혜 정권의 정치공작으로 구속된 통합진보당 이석기 전 의원은 그 정치탄압의 형태가 놀랍도록 닮았다.

 

죽산 조봉암

일제강점기 그는 사회주의자였으며, 독립운동가였다. “사회주의를 연구하고 사회주의자가 되고 사회주의 운동을 하기로” 결심했다고 자서전에서 밝히고 있다. 당시에는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민족해방을 이루기 위해 사회주의 사상이 대안이었다고 생각하는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있었다. 조봉암 또한 그러한 독립운동가 중 한 사람이었다.

 

“조봉암 등 공산당 사건 피고들 법정에 들어가는 광경” / 조선일보 1933.11.17 

해방되고 조봉암은 제헌의회 의원과 초대 농림부 장관을 역임했다. 당시 농림부 장관은 장관 중에서도 막중한 위치였는데, 진보정치권을 아우른다는 이승만 정권의 정치적 판단이 작용했을 것으로 예상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승만은 조봉암이 자신의 정적(政敵)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것 같다.

 

“각 장관의 약력” 조봉암씨(曺奉岩氏). 경기도 강화 출생. 당년 오십세. 중앙대학 정치과 졸업. 1925년과 1927년 양차에 걸쳐 조공대표로 막사과콤인테른에 파견. 1934년 중국 상해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신의주 감옥에서 7년 징역. 1945년 해외 연락 관계로 일본헌병대사령부에 체포되었다가 8. 15 해방으로 출옥. 1946년 민전에 참가 후 동연 이탈. 1947년 3월 민주주의 독립전선 의장단참가. 현(現) 국회의원. /조선일보 1948.08.04

 

이승만 독재 정권에 대항

조봉암은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부패와 부정을 보고 있을 수 없었다. 또한, 신생 대한민국을 바르게 만들고 싶었다. 이에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8월 5일 제2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80여만 표를 얻으며 이승만 정권에 대항한다.

 

“우리는 이대로 더 4년을 살아갈 수 없다!!”“대통령으로 혁신정치가 조봉암 선생을 선출하자!!”/ 조선일보 1952.08.05
“우리는 이대로 더 4년을 살아갈 수 없다!!” “대통령으로 혁신정치가 조봉암 선생을 선출하자!!”/ 조선일보 1952.08.05

 

집권의 꿈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중적 인기를 얻은 조봉암은 1955년 12월 22일 진보당 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지방으로 진보당 조직을 확대하고 본격적으로 이승만 독재를 반대하고, 한반도의 평화통일론을 주장하며 정치 행보를 시작했다.

 

“진보당(가칭) 발기” / 조선일보 1955.12.23.
“진보당(가칭) 발기” / 조선일보 1955.12.23.
▲ 강령(요지)
1. 공산 독재는 물론 자본가와 부패분자의 독재도 이를 배격하고 민주주의 체제를 확립하여 책임 있는 혁신정치의 실현
2. 생산분배의 합리적 통제로 민족자본의 육성
3. 민주 우방과 제휴하여 민주 세력이 결정적 승리를 얻을 수 있는 조국 통일의 실현
4. 교육체제를 혁신하여 국가 보장제를 수립
 

 

야권연대 시도

조봉암은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야권연대를 시도하지만, 야당인 민주당에서 조봉암의 좌익 경력을 문제 삼아 연대를 거부한다. 대선을 10일 앞두고 사망해 무효표가 되는 ‘신익희 추모표’를 조직하며 추악한 행태를 보였다. 무효표는 무려 185만여 표였다.

 

“진보당(가칭)에서 차기 대통령 후보로 추천받은 조봉암 씨는 31일 5월 15일 시행될 정·부통령선거에 대처한 야당연합 전선론을 고려하겠다고 언명하였다.” / 조선일보 1956.04.02.
“진보당(가칭)에서 차기 대통령 후보로 추천받은 조봉암 씨는 31일 5월 15일 시행될 정·부통령선거에 대처한 야당연합 전선론을 고려하겠다고 언명하였다.” / 조선일보 1956.04.02.

 

집권의 가능성

조봉암은 1956년 5월 15일 제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216만 표를 득표했다. 유효표를 기준으로는 30%가 넘는 수치였다. 야권연대가 실현되었다면 ‘신익희 추모표’ 185만 표를 더해 400여만 표다. 온갖 부정과 관권 선거로 얻은 이승만의 500여만 표.

자유당과 이승만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이제 조봉암은 이승만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한 명의 정치인이 아니라 자신의 권력 유지에 가장 큰 위협이 되는 정적(政敵)이 되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1958년 5월 총선과 1960년 4대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을 것이다.

자유당과 이승만이 승리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자유당 후보 이승만 박사의 당선을 축하하는 동시에 금번 선거의 민심의 귀추를 십분 자성하여 금후 시정에 반영하며 종래와 같은 군임적 태도와 경찰전제의 폐해를 광정하기바란다.그리고 210여만 유권자의 지지에 대하여 심심한 사의를 표하는 동시 내월중에 창당대회를 개최하여 진보 세력의 대량진출을 촉성하겠다.” / 조선일보 1956.05.18
“자유당 후보 이승만 박사의 당선을 축하하는 동시에 금번 선거의 민심의 귀추를 십분 자성하여 금후 시정에 반영하며 종래와 같은 군임적 태도와 경찰전제의 폐해를 광정하기바란다.그리고 210여만 유권자의 지지에 대하여 심심한 사의를 표하는 동시 내월중에 창당대회를 개최하여 진보 세력의 대량진출을 촉성하겠다.” / 조선일보 1956.05.18
진보당 조봉암 대통령 후보 선전물. 1956. / 대구경북근현대연구소 소장 자료
진보당 조봉암 대통령 후보 선전물. 1956. / 대구경북근현대연구소 소장 자료

 

마녀사냥

이승만 독재정권은 1958년 새해부터 조봉암과 진보당에 대한 대대적인 정치탄압에 들어갔다. 언론, 사법부, 정보기관 등 권력 기관들이 총동원되어 진보당에 대한 마녀사냥에 동참했다.

조선일보
1958.01.14
조봉암 씨 등 7명을 구속
보안법 위반 혐의

 

조선일보 1958.01.16
진보당에 2차 검거 선풍
재정, 간사 등 4명을 구속
시경서 평화통일 공작혐의로

 

조선일보 1958.01.31
진보당에 제3차 선풍
8명에 영장 신청
통일문제 연구위원 등 검거 위해

 

조선일보 1958.02.18
사건 핵심은 평화통일 선언문 초안
검찰 진보당 사건 전모 발표

 

조선일보 1958.02.26
진보당의 등록을
정식취소
25일부터 불법화

 

조선일보 1958.07.03
진보당 사건 언도
피고 17명에 무죄
조봉암, 양명산엔 각 5년

 

1958년 7월 2일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진보당 사건의 1심 판결이 나왔다. 재판장 유병진 부장판사는 조봉암 및 양명산에게 징역 5년을 선고했다. 그리고 나머지 17명에게는 무죄를 선고했다. 예상치 못한 판결에 이승만 독재 권력은 당황했고 대대적인 반격에 들어갔다.

 

독재자의 살인면허, 사법살인

이에 당시 담당 검사였던 조인구 부장검사는 “간첩에게 5년을 언도한 것은 불가한 일, 오제도 검사실에서 정보부 검사 전원과 비밀회의를 거듭하고 있다”고 말했다.

치안국장은 “진보당 사건을 적발 입건했던 경찰의 담당자로서, 우리가 타공(打共)하는 마당에 용공(容共)적으로 나가는 것은 아니 된다”, “방금 법무부에서는 국가보안법의 저촉 범위를 확대하는 개정안을 성안 중이며 치안국에서는 대공과의 분리 독립을 구상 중에 있다”며 불만을 표명했다.

1심 판결에 불만을 품은 반공청년회 회원 200여 명은 법원 판결 3일 뒤 법원에 난입하여 “유병진 판사 타도”, “조봉암 일당에 간첩죄를 적용하라” 등을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이들 반공청년회원은 자유당 직속 조직인 반공청년단 단원들이었다.

1심 판사 유병진은 판사 재임용에서 탈락하고 판사 생활을 마감했다.

1심 판결을 보고만 있을 이승만 독재정권이 아니었다. 노골적으로 2심 재판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하나 마나 한 뻔한 재판이었다.

 

1958년 재판정에서 죽산 조봉암(사진 왼쪽). 출처 경향신문 사진 자료

조봉암은 최후진술에서 “엉뚱한 허위 사실을 조작하여 사사건건이 나를 잡으려고 한 것은 집권당의 횡포였으며, 이번 사건도 정치적 음모이니 정치적 효과를 거두려면 이 대통령 비위에 맞도록 사형을 판결할 것이며, 역사에 남을 이 사건을 공정하게 재판하려면 무죄 판결을 내려달라”라고 말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승만 독재의 비위를 맞췄다. 검찰의 기소 대부분을 수용하고 평화통일론 자체를 북한과 똑같은 주장이라며 조봉암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이승만 독재정권이 막을 내린 4.19혁명을 9개월 앞둔, 1959년 7월 31일 서울형무소에서 조봉암의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정적(政敵)을 살해한 사법살인은 이렇게 완벽히 진행되었다.

 

(1편 끝)

 

글 _ 강철민 대구경북근현대연구소장


※ 참고 문헌 : 조선일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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