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서울에서 열린 전국노동자대회에 9만여 명의 노동자들이 모였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를 추모하며 노동개악 저지, 민영화 중단을 외쳤다. 11월 22일 민주노총은 죽지 않고 일할 권리와 노동3권 보장, 노조법 2·3조 개정 및 개혁 입법 쟁취를 위한 총파업 총력 투쟁을 선포하며 개혁입법 쟁취 농성에 돌입했다.

전태일 열사 52주기 전국노동자대회를 앞둔 지난 8일, 구미 아사히글라스 수요문화제에서는 민주노총 경북본부 구미지부 배태선 조직국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이날 교육 주제는 “전태일 열사 정신 계승이란 무엇일까”였다. 배태선 국장이 처음으로 만난 전태일과 ‘총파업’ 이야기를 갈무리하여 옮긴다.

 

 

저는 전태일을 처음으로 접하게 된 계기가 시(詩)였습니다.

전태일이란 제목의 시를 팔십삼 년도에 처음 봤는데, 그 시를 보면서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전태일이라는 제목이 사람의 이름이라는 상상을 해보지 못했고, 그 전태일이 전체 노동자의 삶을 세상에 알리면서 죽어 나갔다는 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시 전태일의 첫 문장이 “한국의 하늘아 네 이름이 무엇이냐 나의 이름은 전태일이다.” 입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문익환 목사님이 쓰셨던 그 책, 그 시의 첫 구절이죠.

1983년도에 전태일이라는, 문익환 목사가 쓴 시를 봤을 때 그 전태일이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지, 그의 삶이 뭔지를 짐작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83년도에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번역 출판돼 나온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책을 보면서 굉장히 많이 울었습니다. 도무지 그런 삶이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청년 노동자 전태일의 나이가 우리 나이로 스물세 살이잖아요. 스물 세 살의 나이에 유서를 쓰고 자신의 몸을 불사릅니다.

 

저는 88년에 구미 공장에 한국 오리온 전자라는 사업장에 다녔습니다. 오리온 전자라는 100% 일본 자본 공장에서 컴퓨터와 칼라 티브이를 만들었습니다. 그 사업장은 천사백 명 여성들이 모여 앉아서 쉬는 날 없이 잔업 세 시간은 그냥 자동으로 하는 거였거든요. 삶이 지옥 같았습니다. 노동이 지옥 같았습니다.

그런데 구미공단에서 오리온 전기가 노조 민주화가 되지 않았을 때, 어용노조 시절에 그 사업장 안에 노조 민주화를 해보려고 하다가 해고되신 분들이 계셨어요. 최양진이라는, 그런 분들이 계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연히 그분을 만났는데 그분이 저희한테 “야, 올 11월에 서울에 우리가 단풍 구경을 갈 건데 너거도 같이 가자.” 이렇게 이야기하셨어요.

우리가 공장에만 처박혀 있었는데 서울로 간다니까, 서울을 가본 적도 없는데 버스를 대절해서 간다니까, 이게 웬 횡재냐 싶어서 따라나섰거든요. 우리 공장에 여성 노동자 열 명 정도랑 같이. 아침에 버스를 정확히 어디서 탔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제 기억에는 공단 운동장이었던 것 같습니다. 오리온 전기 기숙사도 가깝고. 그분들 그 당시에 다 총각이셨으니까. 우리가 다 아는 누구나 모이는 공단 운동장에서 버스를 탔는데, 이 버스가 서울로 가긴 갔어요.

그런데 우리가 내린 데가 어디냐 하면 혹시 연세대 아십니까? 연세대 정문에 우리를 내렸습니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도대체 여기가 어딘지도 모를 만큼 사람이 많은데 안에서 함성이 막 들리는 거야. 구호 소리였지요. 노동자는 하나다, 민주노조 건설하자. 이런 구호를 외쳤습니다.

그 아저씨가 우리보고 “빨리 내려라 지금 자리가 없으니까 빨리 들어가야 한다”고 해서 일단은 사람을 잃어버리면 길을 못 찾으니까, 앞사람을 따라서 미친 듯이 들어갔는데 거기가 연세대학교 노천 강단이었습니다.

단병호 위원장이 붉은색 머리띠를 메고 혈서를 썼던 그 당시 노동법 개정 전태일 열사 정신 계승 제1회 전국노동자대회였거든요, 88년 11월 그때가. 3만 명이 모였습니다. 들어가니까 이미 다른 지역 사람들이 자리를 다 차지하고 있어서 우리는 산꼭대기 같은 데서 겨우 봤는데 우리가 도착했을 때 대회는 거의 다 끝났고 마지막에 대표자들이 나와서 ‘노동해방’ 혈서를 쓰는 순간이었어요.

 

▲1988년 제1회 전국노동자대회에서 혈서로 쓴 노동해방 현수막을 들고 행진하는 대오. 사진 박용수, 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988년 제1회 전국노동자대회에서 혈서로 쓴 노동해방 현수막을 들고 행진하는 대오. 사진 박용수, 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전 가슴이 터지는 줄 알았습니다. 야, 구미 공장에 있을 때 우리만 이런 줄 알았는데 여기 와 보니까 세상에 이 많은 사람이 우리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구나, 가슴이 터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혈서를 앞세우고 행진을 시작했습니다.

근데 동지들 지금 우리는 행진 코스 다 알잖아요. 어디에서 어디까지가 행진 코스다. 우리는 그때 몰랐습니다. 어디로 가는지 몰랐고 물 밀듯이 밀려나가는 그 대오를 따라서 깃발도 없이 아무것도 없이, 그냥 무조건 들뜨고 신나서 세상에 이런 날이 있구나, 이런 순간이 있구나, 이런 장소가 있구나! 그래서 우리가 연세대를 벗어나서 무지무지하게 막 걸었거든요. 너무 좋아하면서, 미친 듯이 좋아하면서, 신나서 옆 사람보고 막 인사하면서. 어디서 오셨습니까, 우리 구미에서 왔는데요.

연세대에서 가까웠던 위치였던 것 같아요. 혹시 서강대 아십니까. 연세대하고 가까운 데라고 이야기만 들었고, 지금도 사실은 정확하게 거기가 어딘지 잘 모릅니다만, 연세대를 지나서 서강대 담장을 지나는데 도로가 크지 않았던 걸 기억합니다. 그 담장 사이 도로에 우리가 빽빽히 미어터질듯이 걷고 있는데 서강대 담벼락에 한 글자씩 쓰인 대형 피켓이 올라왔어요. 그 대형 피켓의 글자가 ‘노동계급의 영웅적 투쟁 만세’ 였습니다. 저는 그날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 순간을.

노동계급의 영웅적 투쟁만세. 노동이 지옥 같았는데 우리가 모이니까 이런 일이 벌어지는구나, 이렇게 달라지는구나라는 걸 온몸으로 느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굉장히 많이 걸었는데 모두가 도취한 상태로, 그 대오가 걸었습니다. 구호도 외치고 노래도 부르고. 우리가 도착했을 때 마포대교를 건넜거든요. 민주노총이 마포대교를 건너는 게 몇 번 없는데 그때 마포대교를 건넜습니다. 무지하게 넓은 도로의 모든 차를 정지시키고 우리가 그 대로를 걸어갑니다. 세상이 뒤집어진 거죠. 그 많던 차들은 오간 데 없고 노동자의 당당한 행진이 그 대로를 장악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도착했던 데가 여의도 공원이었거든요. 그 여의도 공원. 근데 이미 해가 졌어. 지금은 우리는 노동자들이 가면 조합원들이 언제 가요 합니다. 해 떨어지면 집에 가야 된다 하고, 언제 가냐 하고. 그런데 그날 해가 지는 게 그냥 장엄했어요. 새벽밥 먹고 단풍 구경 간다고 해서 모르고 실려 왔지만. 점심을 먹었던 기억도 잘 없습니다. 그 대회를 마치고 3만 명의 노동자들과 함께 그 거리를 행진해서 해가 지는 여의도 광장까지 우리가 행진했다라는 사실, 이것만으로도 굉장히 벅차고. 세상이 저한테는 완전 다른 세상이었어요. 이런 날이 우리한테 있구나.

여의도에 도착했을 때 누군가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얀 두루마기를 입고 누군가 이야기를 했어요. 그 사람이 바로 그 전태일의 시를 썼던 문익환 목사였습니다. 딴 분들이 발언했던 건 전혀 기억이 나지 않고 딱 그분만 기억을 합니다. 그때 저는 처음 들었습니다.

 

“노동자 여러분 세상을 정말 여러분들의 것으로 만들려면 총파업 하십시오. 여러분들의 손에는 세상을 바꿀 가장 강력한 무기가 있습니다. 노동자 여러분 총파업 하십시오.”

 

이렇게 이야기하셨거든요. 저는 진짜 가슴에 불화살을 받은 것 같았어요. 아, 우리 노동자가 총파업을 할 수 있다면 세상이 달라지겠구나! 그래서 그날 이후 저의 로망이기도 하고, 꿈이기도 하고, 우리 모두가 반드시 해보고 싶어 하기도 한 총파업이 있었던 거죠.

사실 전태일 열사의 죽음 이후에 한국 사회가 전자충격을 당한 듯이 충격에 빠졌습니다. 가장 많이 놀라웠던 사람들은 소위 한국 사회의 민주화에 기여하고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다고 하는 종교계, 그리고 대학생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종교단체에서 노동자를 지원하는 야학들이 만들어지고, 노동야학들이 만들어졌지요, 그리고 지원 상담실이 만들어졌죠. 그리고 대학생들은 우리가 노동자의 옆으로. 전태일은 단 한 명의 대학생이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이야기하고 살아 생전 대학생을 만나지 못한 채 스스로의 몸에 불을 붙였다, 살아있는 깨어 있는 대학생이 지금 해야 할 일은 노동자들의 곁으로 가는 거다. 그래서 70년대 후반부터 많은 대학생들이 현장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이 팔십 년대 중반까지 그래서 여러분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소위 위장취업자라고 이야기하는, 빨갱이라고 이야기하는 또 이후에는 학출이라고 불리는 그런 사람들이 현장에 들어가게 되는 거죠. 그래서 그들과 함께 87년 노동자 대투쟁이 벌어지고, 87년 노동자 대투쟁 바로 그 직후 88년에 아까 이야기했던 그 연세대학교에서 열사 정신계승 전국노동자대회 제1회 대회가 개최된 겁니다. 얼마나 역사적입니까.

저는 지금 그런 생각을 합니다. 너는 지금 전태일이 될 수 있느냐, 네 이름이 무엇이냐 라고 문익환 목사님, 시인이 우리한테 물었을 때 본인 스스로가 ‘나는 전태일이요’라고 답해주고 싶었을 겁니다.

저는 지금 곳곳에서 전태일을 만납니다. 전태일 열사가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고 얘기했습니다. 열사가 간 지 52년이 지났는데 근로기준법을 적용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300만 명이 있습니다, 지금 5인 미만 사업장의 노동자들이. 일하는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노동조합이 없는 사업장에서 일을 하면 불법은 누가 저지릅니까, 자본가들이 저지릅니다. 대한민국 사업장의 95%는 노동조합이 없습니다. 그 사업장에서 불법은 자본이 저질러요. 그런데 노동조합을 만든 노동자들이 불법 행위자로 낙인찍혀 있습니다. 완벽하게 힘이 기울어져 있는, 우리는 지금도 그런 사회에 삽니다.

전태일 열사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것, 그건 우리 누군가가 전태일이 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누군가가 오늘도 우리 사회에서 가장 아프고 힘든 노동자의 삶을 자신의 삶과 일체화시켜서 끊임없이 그들의 손을 놓지 않고 함께 가려고 하는 거, 저는 그거라고 생각합니다. 전태일이 누구냐, 우리 모두가 전태일이죠.

문익환 목사님이 하셨던 이 시의 구절처럼 우리가 지금 당장 전태일의 삶을 다 이해하고 온전히 그걸로 살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의 정신이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으로 있는가, 그리고 앞으로 우리의 삶에 어떤 것으로 남아야 하는가,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저는 이 자리에 있는 동지들이 전태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전태일의 삶, 그가 남긴 정신 잊지 않고 기억하고 계승하는 건 우리들의 실천과 행동이다, 동지들과 함께 그것을 잘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투쟁.

 

 

문익환 목사가 직접 쓴 시 전태일. 출처=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문익환 목사가 직접 쓴 시 전태일. 출처=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문익환 목사가 직접 쓴 시 전태일. 출처=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문익환 목사가 직접 쓴 시 전태일. 출처=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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