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88=프랑스의 얼굴과 우정의 기록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포스터

1_ 바르다×제이알을 만나다

 

88세의 노장 감독 아녜스 바르다는 33세의 사진 예술가 제이알을 만난다. 사진을 인쇄해 공간에 부착하는 예술 실천 활동으로 주목받던 제이알은 십 년째 신작 활동이 없었던 아녜스 바르다에게 포토 트럭(이동사진관 형태)을 타고 프랑스 곳곳을 방문하는 여행을 제안하고, 그렇게 여행은 시작된다. 55년의 세월을 넘어, 서로 티격태격하며 진행한 작업은 2007년 영화 “해변” 이후 10년 만에 한 편의 다큐멘터리 영화로 완성된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이라는 제목으로.

아녜스 바르다는 영화 애호가들에게는 여러 면에서 각별한 존재이다. 고전 영화 방식을 벗어나 ‘누벨바그’라는 혁신적 개념을 선보인 일군의 프랑스 영화감독 그룹 내에서 여성으로선 거의 유일하게 어깨를 나란히 한다. 장 뤽 고다르를 제외하면 가장 최근까지 작품 활동을 이어온 감독이기도 하다. 심지어 아녜스 바르다는 당시 영화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 출신 평론가들이 직접 영화 작업에 뛰어들기 이전부터 활동해온 원로이기도 하다. 

아녜스 바르다의 영화는 극과 다큐를 넘나들며 다양한 형식적 실험을 진행해왔음은 물론, 페미니즘과 좌파적 인식을 기반에 두고 있다. 노장이 되면 신작이 뜸해짐은 어쩔 도리가 없지만, 아녜스 바르다의 말년 다큐멘터리들은 흥미롭고 경청할만한 내용으로 가득한 수작들이었다. (바르다 감독은 2019년에 향년 90세로 타개했으며,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뒤에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라는 유작을 남겼다.)

제이알은 사진을 촬영하고 그 사진을 크게 출력해 공간 여기저기에 붙이는 퍼포먼스로 유명해졌으며, 영상작업도 겸하는 젊은 예술가이다. 절대로 벗지 않는 모자와 선글라스가 트레이드 마크다. 바르다의 친구이자 누벨바그의 동료인 장 뤽 고다르 감독의 젊은 시절과 겹쳐 보이는 제이알은 자유분방하게 바르다 할머니를 모시고(!) 프랑스 전역을 포토 트럭과 함께 누비기 시작한다. 그리고 많은 이들을 만나 다양한 작업을 벌인다. 그녀와 그의 여정은 바르다의 개인적 기억과 프랑스의 다양한 얼굴들을 찾아낸다.


2_ 프랑스의 얼굴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스틸 이미지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스틸 이미지

<1> 첫 번째 얼굴 : 쇠락한 탄광촌

바르다와 제이알은 과거 수백 년에 걸쳐 프랑스 산업을 지탱해왔지만, 이제는 많은 이들이 떠난 한 탄광촌에 도착한다. 과거의 영광과 자부심은 그림엽서 등에 남아있을 뿐이다. 일행은 빛바랜 사진들을 출력해 폐허가 되어가는 건물 외벽에 부착한다. 그 사진들은 산업 역군이라 할 광부들, 지역 주민들의 선조들을 기념한다. 이어서 이주를 거부하고 동네의 유일한 주민으로 남은 할머니를 만나고 그녀의 의지가 서린 표정을 그녀의 집 전면에 부착하는 것으로 경의와 연대감을 표시한다.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 등의 르포 도서나 <땐뽀걸즈> 같은 영화를 통해 국내에서도 근래 사회문제가 된 지 오래인, 제조업 기반의 붕괴가 지역 공간에 미치는 파괴적 영향력을 생각하며 보면 좋을 에피소드.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스틸 이미지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스틸 이미지

<2> 두 번째 얼굴 : 기계화된 농업지대

그림 같은 프랑스의 전원을 지나 바르다와 제이알은 농업지대 한복판에 홀로 서 있는 창고에서 한 남자를 만난다. 흔히 상상하는 여럿이 일하는 농사가 아니라 고도로 기계화되어 800헥타르를 고독하게 경작하는 농부와 이야기를 나눈다. 과거에는 4~5명 이상이 함께 일상을 보내던 전답은 여러 대의 기계를 이용해 고도로 산업화한 지 오래다. 하지만 농부의 표정은 여유롭고 자연스럽게 보인다. 농부의 얼굴은 창고 대문에 아로새겨져 지나는 이들에게 그의 존재를 알릴 것이다. 한국 농업의 현실과는 거리가 꽤 있어 보이지만, 미래의 우리 농업도 저런 형태로 자리를 잡지 않을까 생각에 잠기게 되는 에피소드.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스틸 이미지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스틸 이미지

<3> 세 번째 얼굴 : 종지기와 웨이트리스

시골 마을에서 일행은 선조들의 순애보를 듣고 노부부의 사진을 후손들의 집 벽에 부착한다. 손자 손녀들은 신기해하며 셀카를 찍고 인스타그램 등에 게시한다. 낡은 돌담에 마을 카페의 웨이트리스가 마치 고전 영화의 여배우 스틸 사진처럼 붙고 SNS에 작은 화제를 일으키며 마을 최고의 유명인이 된다. 본인은 당혹스러워하지만, 그녀의 자녀들은 즐겁다. 사진 촬영을 위한 소품으로 양산을 후원했던 골동품상 주인은 마을의 종지기이기도 하다. 고색창연한 낡은 종탑에서 그는 자부심에 차 일행에게 종의 작동 원리를 설명하며 오래된 공동체의 정취를 일깨운다. 도시재생 혹은 마을공동체 붐과 함께 보면 좋을 에피소드.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스틸 이미지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스틸 이미지

<4> 네 번째 얼굴 : 교대제 공장의 노동자들

농촌 전원지대를 일주하던 일행은 염산을 제조하는 공장에 도착한다. 공장의 노동자들은 교대 근무를 하느라 다들 서로 볼 수가 없다. 바르다와 제이알은 궁리 끝에 두 근무조를 별도로 단체 사진을 촬영하고 이들의 사진을 교묘하게 배치해 살풍경한 공장의 벽면에 그 공장에서 일하는 모두가 함께 위치하는 풍경을 완성한다. 공중에 우뚝 솟은 물탱크 벽에는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처럼 사진을 붙인다. 단체 사진이 붙은 벽에서 자기 위치를 찾으며 즐거워하는 노동자들을 통해 무채색 공장에 생명력과 공동체의 기운을 불어넣는 풍경은 폐공장을 활용한 문화예술 공간 구현보다 진일보해 보인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스틸 이미지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스틸 이미지

<5> 다섯 번째 얼굴 : 폐허 마을

건물은 사람이 살면 더 소모될 것 같지만 실제로는 사람이 살지 않을 때 더 빨리 낡아 버린다고 한다. 그래서 집에는 사람이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처럼, 건설 도중에 이주계획이 폐기되어 흉가처럼 방치된 주택 단지를 발견한 바르다와 제이알은 다양한 사람들을 끌어모아 작은 파티를 기획한다. 참석한 남녀노소의 사진을 촬영해 짓다 만, 이제는 허물어져 가는 건물들에 사진을 붙인다. 낙서와 쓰레기로 차 있던 주택 단지에 사진으로나마 주민들이 그득해지는 풍경을 선사하는 에피소드는 슬럼화 현상에 대한 우화처럼 느껴진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스틸 이미지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스틸 이미지

<6> 여섯 번째 얼굴 : 우편배달부의 초상

일행은 바르다와 친분이 있는 우편배달부를 만난다. 우편배달부는 수십 년간 고립된 이들에게 우편물은 물론 필수품과 소식을 전해왔다. 우편배달부는 자기가 돌봐왔던 주민들 이야기를 들려준다. 효율과 절약을 위해 인력을 줄이고 무인 영업이나 자동발매기를 도입하는 가게들, 통폐합되는 인구 희소 지역 공공서비스 기관들의 소중함을 느껴볼 수 있는 일화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스틸 이미지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스틸 이미지

<7> 일곱 번째 얼굴 : 염소 목장의 방법론

낙농 지대로 진입한 일행은 염소 목장에 들른다. 염소들에게 뿔이 없다. 물어본즉, 뿔로 서로 싸우다 다치기 일쑤라 어릴 때 불로 지져서 뿔이 나지 않게 한다고 한다. 도시에 살던 일행은 상상 속 이미지와 다른 현실의 염소들을 보며 당황스러워한다. 목장에서 젖을 짜고 낙농품을 만드는 과정은 고도로 체계화되어 있고 기계를 활용했다. 다른 목장을 찾은 일행은 뿔이 달린 염소를 보며 반가워한다. 보다 소규모로 착유기 대신 손으로 젖을 짜는 풍경을 보면서, 바르다와 제이알은 마을 교차로의 벽에 뿔이 달린 염소의 사진을 붙이고, 지나가던 주민과 이야기를 나눈다. 동물복지와 생태 문제로 확장되는 에피소드.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스틸 이미지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스틸 이미지

<8> 여덟 번째 얼굴 : 대서양 방벽의 잔해

바르다는 본래 영화가 아니라 사진 작업에 열중했다고 한다. 그녀의 초기 작업에 모델이 되어준 사진가와 촬영 장소를 찾아간 일행은 과거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고 있던 시절, 연합군의 상륙을 막기 위해 ‘대서양 방벽’이라 불리던 해안 방어 시성 벙커가 해변에 조각나 떨어져 있는 풍경을 발견한다. 엄청나게 큰 콘크리트 덩어리에 친우였던 사진가의 사진이 마치 앉아서 휴식을 취하듯 새겨진다. 하지만 대서양의 격렬한 조석 간만 현상은 바로 다음 날 사진을 휩쓸어버리고 만다. 시간의 흐름에 아연실색하며 역사의 현장을 지나는 제이알과 바르다의 에피소드.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스틸 이미지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스틸 이미지

<8> 여덟 번째 얼굴 : 르 아브르 항구의 여자들

르 아브르 항구를 찾은 일행은 제이알과 이전 작업에서 관련을 맺었던 항만 노동자들을 통해 새 프로젝트를 추진한다. 거대한 항만과 그곳에서 물류를 책임지며 또한 스스로의 권리를 위해 여러 차례 투쟁해온 항만 노동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일행은 그런 기억을 간직할 이미지를 궁리한다.

결과로 선택된 것은 항만 노동자의 아내들이었다. 그저 투쟁하는 남편들의 뒤에 서 있는 게 아니라 동지이자 각자 스스로 다양한 활동을 펼치는 그녀들의 사진을 촬영한다. 노동자들의 협조로 거대한 수출입 컨테이너를 항구에 캔버스처럼 쌓아 올린 벽에 마치 거인 신처럼 세 명의 사진이 부착된다. 사진으로 재현된 그녀들의 가슴 부분에 해당하는 컨테이너 문을 열고 공중에 걸터앉은 모습은 항구의 수호신처럼 당당하고 초월적인 존재로 형상화된다.

노동의 가치, 그리고 여성의 존재감에 대한 강렬한 발언처럼 들리는 르 아브르 에피소드는 거장의 통찰과 당대 세상에 대한 견해를 웅변하는 듯하다. 일행들과의 대화는 우리가 피상적으로 단정하는 ‘노동자의 아내’ 허상을 깨트리고 재구성한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스틸 이미지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스틸 이미지

<9> 아홉 번째 얼굴 : 바르다의 눈과 발

바르다는 여정 와중에도 점점 눈이 흐려지고 혈기방장한 제이알과 보조를 맞추기 힘들어한다. 두 사람은 죽음에 대해, 그리고 노년에 관해 이야기를 자주 나눈다. 제이알은 바르다의 눈과 발을 사진으로 찍어 화물열차 차체에 붙인다. 특색 없는 화물열차 칸이 그의 일부를 부착함으로써 예술화되고, 제이알의 말처럼 이제 인생의 황혼에 이른 바르다 대신에 기차가 그녀의 눈으로 보고 그녀의 발로 여행을 떠날 것이다. 여정이 종착점으로 향하고 있음을 전하는 에피소드.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스틸 이미지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스틸 이미지

<10> 열 번째 얼굴 : 고다르≠제이알

오랜 영화 친구, 장 뤽 고다르가 있는 스위스 시골 마을로 향하며 바르다와 제이알은 옛이야기를 나눈다. 개인적인 동시에 세계영화사의 한 토막이기도 하다. 바르다가 미리 전갈을 보낸 시각에 고다르의 집에 도착하지만, 그는 부재한 듯 보이고 다만 대문에 수수께끼 같은 글귀가 몇 줄 쓰여 있을 뿐이다. 낙담한 바르다와 그를 달래는 제이알의 풍경이 이어진다. 바르다는 상심하지만, 복수(!)의 답글을 남긴다.

두 사람은 호수에 앉아 긴 여정을 이야기하고 고다르에 대한 의견을 나눈다. 오랜 친구의 괴벽에 씁쓸해하는 듯한 바르다를 보며 제이알은 선글라스를 벗는다. 그렇게 바르다의 황혼에 고다르 대신 제이알과의 우정이 아로새겨지고 화면은 그림 같은 애니메이션으로 변한다.


3_ 세대를 넘어선 우애와 세심한 사회적 통찰이 어우러지다

아녜스 바르다 감독과 누벨바그 영화의 팬이라면 고다르와의 일화를 비롯해 즐겁게 볼 수 있는 기록이다. 제이알의 사진 퍼포먼스 연장 선상에서 보자면 예술의 사회적 기능과 역할을 극대화하는 전시 영상이기도 하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은 두 지점이 적절하게 결합과 분리를 거듭하며 1시간 30여 분 동안 격렬한 대립이나 사건 없이도 지루할 틈 없이 펼쳐지는 대가의 솜씨가 잘 발휘된 작품이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은 씨줄로 아녜스 바르다 감독의 과거 회고와 제이알과의 우정 형성 과정을, 날줄로 그저 지나치기 쉬운 사각지대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존경을 표하는 과정이 촘촘하게 잘 짜인 작품이다. 영화의 역사나 예술영화감독들에 대해 잘 알지 못하더라도 프랑스의 아름다운 시골 풍경 속에서 다양한 사회적 의제들, 그리고 ‘민중사’의 영역들에 대한 감독의 존중과 관심을 듬뿍 느낄 수 있는 영화다. 영화를 재미있게 봤다면 감독의 다른 작품들도 한번 찾아보자. (감독의 주요 대표작들은 VOD 다운로드 서비스 등으로 볼 수 있다)

 


영화 정보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Faces Places, Visages, villages

프랑스, 다큐멘터리, 2017

2018.06.14 개봉, 93분, 전체관람가

감독 아녜스 바르다, 제이알

주연 아녜스 바르다, 제이알, 미미

 

70회 칸영화제(2017) 초청(비경쟁부문)

66회 멜버른국제영화제(2017) 초청(헤드라이너)

42회 토론토국제영화제(2017) 관객상-다큐멘터리

65회 산세바스티안국제영화제(2017) 초청(도노스티아상 스크리닝)

36회 밴쿠버국제영화제(2017) 국제다큐멘터리 관객상

55회 뉴욕영화제(2017) 초청(메인 슬레이트)

61BFI 런던영화제(2017) 후보(다큐멘터리경쟁)

41회 상파울로국제영화제(2017) 관객상-국제다큐멘터리

30회 암스테르담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2017) 초청(마스터)

83회 뉴욕비평가협회상(2017) 다큐멘터리상

43LA비평가협회상(2017) 다큐멘터리상

30회 시카고비평가협회상(2017) 후보(다큐멘터리상)

52회 전미비평가협회상(2017) 다큐멘터리상

89회 미국비평가협회상(2017) 다큐멘터리 톱5

43회 세자르영화제(2018) 후보(다큐멘터리상, 음악상)

33회 인디펜던트 스피릿 어워드(2018) 다큐멘터리상

90회 아카데미시상식(2018) 후보(장편다큐멘터리상)

2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2018) 초청(개막작)

6회 무주산골영화제(2018) 초청(영화 판())

20회 정동진독립영화제(2018) 초청(특별상영작)

17회 마라케시국제영화제(2018) 초청(트리뷰트, 시네마 앤 오디오디스크립션)

39회 런던비평가협회상(2019) 다큐멘터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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