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은 어디에나 있다. 쉽게 비가시화되고 무시당하고 누락당할 뿐. 지금껏 우리가 이루어 낸, 실현해나가고 있는 모든 투쟁 현장에는 여성이 있었다. 프랑스 혁명 당시, 베르사유 궁전의 문을 연 것은 여성 시위대였다. 남성들이 권력에 기가 눌려 혹은 자기가 가진 것을 지키고자 아무도 궁전에 쳐들어가지 못하겠다고 했을 때 몇 날 며칠을 무거운 대포를 들고 행진한 이들은 여성들이었다. 칠레 혁명 당시 끝까지 남아 정부와의 협상에서 배제된 이들의 권리를 위해 목소리 내기를 멈추지 않은 이들은 여성들이었다. ‘이제 끝나지 않았느냐’는 분위기
유치원에 다닐 무렵이었다. 간밤에 다녀간 산타 할아버지가 두고 간 선물은 동화책이었다. 지금은 내용이 무엇인지도 기억나지 않는 그 책을 그때 나는 책 모서리가 닳을 만큼 매일 읽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산타 할아버지는 내년에도 또 올 테니까. 다만 한 권이 아니라 전권을 선물해 달라는 내 기도를 그가 들어줄지 걱정이었다.화장실에 갈 때면 꼭 책을 들고 갔다. 책을 다 읽어야만 화장실에서 나왔는데, 어째서인지 다행히도 지금껏 ‘항문 외과’를 드나든 적은 없다. 집에는 몇 번씩 완독한 책이 빼곡했고, 읽을 책이 없으면 역사 교과서를 읽
여느 날과 다름없이 늦은 밤 집에 돌아와 침대 위에 엎드려 책을 읽고 있을 때였다. 문을 닫은 뒤에도 종종 영업 중이냐는 손님들의 문의가 있었던 터라 낯선 번호가 찍힌 폰 화면을 보며 잠깐 멈칫했다. 매년 OECD 국가 중 노동시간 1, 2위를 다투는 한국에서 모든 노동자에게 일과 쉼의 양립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휴일 없이 매일 디저트를 만들고 책을 읽고 모임을 하는 나는 휴식할 때만큼은 어떠한 방해도 받고 싶지 않다. 울려대는 폰을 몇 초간 응시하다 결국 전화를 받았다.“글쓰기 모임 신청하려고요.”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형님, 왕년에 제 앞에서 여자들이 질질 쌌습니다.”삶을 운동에 온전히 바쳤다 해도 과언이 아닌 남성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그는 언제나 조합원들 앞에서 자본이 노동자를 어떻게 착취하는지, 노동자가 왜 하나로 뭉쳐야 하는지를 설명했다. 이성적인 모습으로 강단 있게 행동하면서도 적절한 때에는 감성에 호소하던 그는 베테랑 활동가였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매료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누구나 칭송해 마지않는 훌륭한 활동가의 입에서 여성은 꽤 자주 성적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에게 단순한 ‘농담’이었다.그가
엄마는 늘 깨어있었다. 모두가 잠든 늦은 시간까지 반찬을 만들고,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 아침을 차렸다. 30년 동안 일을 쉰 적이 없었던 엄마의 하루에는 언제나 밥상을 차려야 하는 노동이 있었다.엄마는 타지에서 대학을 다니던 나와 학교 식당에서 함께 밥을 먹다가 ‘MSG가 가득 들어간 음식을 매일 먹을 나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며 눈물을 보였다. 그 후 매달 반찬으로 꽉 채운 상자가 자취방으로 배송됐다. 곰팡이가 생겨 반찬을 버릴 때면 엄마에게 전화해 쓸데없이 왜 이렇게 많은 반찬을 보냈느냐고 투덜거렸다.엄마는 나와 냉랭함이 감
몇 년 전 시중에 유통되는 10여 종의 생리대에서 독성 유해 물질이 검출됐다는 뉴스가 보도된 이후, 생리컵이 생리대 대체재로 떠오르면서 많은 여성이 생리컵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나 역시 생리대를 둘러싼 논란 이후 생리컵을 사용해왔다. 내가 생리컵을 사용한다고 말하면, 주위에서 사용 후기를 묻곤 하는데 그때마다 나는 눈알을 한 바퀴 굴리며 “쩐다!”고 말한다. 또 생리컵을 사용하는 친구들과 함께 ‘이제 절대 생리컵 쓰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하나같이 입을 모아 생리컵을 찬양하기도 한다.생리컵은 1937년 미국에서 발명되어 외
지난 2020년 11월 정의당 젠더인권본부에서 지역 여성 조직 활성화 사업의 하나로 “우리 동네 정의당 페미니즘 모임”을 공모했다. 당시 정의당구미시위원회창당 3주년 기념행사(코로나로 인해 개최하지 못함)를 준비하는 와중에 김경순 위원장과 김희정 여성위원장의 제안으로 공모에 신청했다. 선정 결과 10개 모임 중에 구미시위원회의 “(잘) 보이는 여자들” 모임도 이름이 올라 있었다.선정된 후 정의당구미시위원회 밴드에 공고하여 참여할 인원을 모집한 결과 당원 8명과 비당원이 적극적으로 호응해 주어서 모임 구성의 여러 조건 중 하나인 여
걔 학교 잘렸대. 폴리아모리인가 뭔가 그거 때문이라던데? 나도 잘 모르는데 여럿이 사귀는 거래. 애인이 자기 말고 다른 애인을 한 명 더 사귀고, 셋이 같이 산다나. 말이 되냐? 그게 그룹섹스지 뭐야. 애인 둘 끼고 있는 여자도 웃긴데 그걸 용납하는 새낀 무슨 생각이냐 대체. 애인이 다른 새끼랑 자면 질투도 안 나나. 우리 교회 목사님은 난교라고 하던데 딱 맞는 말 아니냐. 사실 그냥 바람이나 난교라고 하기 부끄러우니까 괜한 이름 붙여서 면죄부 받으려는 거지. 폴리아모리는 무슨. 아무리 포장해봤자 똥이 꽃으로 변하냐. 더러워.그 새
“증인, 선서하세요.”“선서. 양심에 따라 숨기거나 보태지 아니하고 사실 그대로 말하며, 만일 거짓말을 하면 위증의 벌을 받기로 맹세합니다.” 작년 여름, 포항 법원 제1호 법정. 나는 형사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내 왼편에는 검사가, 오른편 피고인석에는 한동대 학생처장이 앉아 있었다. 죄명은 명예훼손. 학생처장이 나의 실명과 함께 나에 대한 모욕적인 발언이 담긴 문자를 교회에 퍼뜨렸기 때문이다. 새삼 피고인석에 “국민”으로서 앉아 있는 학생처장의 모습이 묘하게 다가왔다. 2년 전, “국민으로서 얘기하려면 학교 밖에서 해!”라고
포항에는 나의 20대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대학교 입학 후 학기 중은 물론 방학을 해도, 휴학을 해도 나는 포항에서 지냈다. 무기정학이 아니었다면, 아마 서른 살도 포항 바다 앞에서 맞이했을 확률이 높다. 비록 월세였지만 하나둘 살림을 꾸린 나만의 원룸이 좋았고, 집 근처 끝없이 펼쳐진 바다가 좋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오밀조밀 모여 사는 동네가 좋았다. 포항 토박이도 잘 모르는 나만의 히든 플레이스도 몇 군데 있었다. 인적 드문 바닷가라던가, 구석에 숨겨진 호수 산책로라던가, 잘 알려지지 않은 맛집 같은 곳들.징계 무효 확인 재판
“우스갯소리지만… 어떻게 하면 학교에서 그렇게 징계를 받을 수 있어요?”“아, 모르시는군요? 제가 만든 명언인데… 노력 없이 징계 없다! 노오~력을 해야죠.” 지난달, 한동대와 장신대의 부당징계 당사자들이 처음 만난 자리에서 나온 말이다. ‘당사자 개그’라는 게 있다면 아마 이런 식일 거다. 일곱 명의 ‘쫓겨난 사람들’이 모여 각자가 경험한 부당징계 사건을 나누며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헐 그 학교도 그랬어요? 저희 학교가 제일 문제인 줄 알았는데.”“징계 과정도 지난하고 아팠지만, 징계 이후의 삶도 확 달라졌어요. 앞으로 뭐를
“피고 학교법인 한동대학교와 피고 OOO은 공동하여 원고에게 500만 원을 지급하라” 열 달 동안 진행된 소송의 최종 판결이 이뤄진 시간은 채 5분도 되지 않았다. 미처 내용을 파악할 새도 없이 이뤄진 선고에 어리둥절했지만, 결과는 일부 승소였다. 사건의 시작은 재작년 12월, 페미니즘 강연을 주최했다는 이유와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한동대는 나를 징계했다. 졸업을 1년 앞둔 무기정학 처분이었다. 교수와 목사들은 집단적으로 나에 대한 비방을 시작했다. 내가 맺는 관계와 사생활을 악의적으로 폭로(아웃팅)하고, 나를 “암세포”와 “곰팡이”
14일 오후 2시 30분, 한동대학생 부당징계 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는 대구지방검찰청 포항지청 앞에서, '한동대 국가인권위 권고 수용 및 일부 기독교단체 가짜뉴스 중단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국가인권위원회에서는 지난해 12월 22일 ‘피해학생에 대한 무기정학 및 특별지도 처분을 취소할 것과 유사한 사례의 예방을 위해 재발 방지대책을 수립, 시행’할 것을 한동대에 권고하였으나, 대학 측은 현재까지도 권고안을 수용하지 않고 있다.권영국 변호사(공대위 상임대표)는 “우리 사회에서 누군가를 마녀처럼 만들어 놓고 공격하는 것은 가장 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