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수인’이 쏘아 올린 작은 공

 

"야구소녀" 영화 포스터 이미지

1_ ‘프로야구’에 대한 단상


1980년 5월 광주의 유혈로 탄생한 전두환의 5공화국 정부는 3S 정책을 통해 여론을 돌리려 시도한다. 스포츠와 스크린, 섹스로 상징되는 수단 중 스포츠 분야의 필두는 1982년 시작된 프로야구였고, 당시 절대강자는 대구를 연고로 둔 삼성 라이온즈였다. 이때만 해도 급조된 프로야구 리그는 스폰서 대기업의 주도하에 운영되었고, 지역 연고는 후일 장착되는 개념이었다. 늘 삼성은 막강 전력으로 정규리그 1~2위를 다투었지만, 플레이오프에서 뜻밖의 일격을 당해 우승을 놓치는 것으로 유명했다. 첫 시즌인 1982년에는 OB 베어스에 끝내기 만루 홈런으로 좌절했고, 이후에도 롯데 자이언츠의 최동원, 해태 타이거즈의 선동열에게 일격을 맞곤 했다.

특히 해태 타이거즈와의 대결은 당시 정권에 의한 의도적인 지역감정과 맞물려 전쟁 같은 상황을 여러 번 연출했다. 역전패당한 분풀이로 해태 구단 버스가 불타는 지경까지 이르는 살풍경함을 선보였을 정도. 어릴 적 대구 시민운동장에 시합을 보러 몇 차례 간 적도 있지만, 곧 시대를 풍미한 농구대잔치와 마이클 조던의 등장으로 세계구급 인기를 얻던 NBA 리그로 관심은 옮겨갔다. 다시 프로야구에 주목하게 된 것은 시합 외적인 관심이었다.

2000년대 초반, 근 20년의 역사를 갖게 된 한국 프로야구-KBO 리그에서는 선수들에 의해 ‘선수노조’ 출범 논의를 시작한다. (그 첫 시도는 1988년, 레전드 투수 최동원이 주도했었다) 당시 선수협 구성 과정에는 노조 탄압이 일상이던 구단 소유 기업들의 후진적 탄압이 극에 달했고, 그 절정이 MBC <100분 토론>에서 온 국민에 드러났다. 그 결과 여론을 자극하고 정부와 정치권이 나서면서 우여곡절 끝에 선수협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한국 프로야구는 여전히 구단을 소유한 대기업의 입김이 강한 편이지만 팬 서비스나 지역 연고, 선수 육성체계가 상당 부분 개선되었다고 평가된다.

하지만 현대 프로스포츠의 공통된 특징-극소수만이 프로 리그에 진입할 수 있고, 스타플레이어가 아니면 모래알처럼 사라진다는 것, 그리고 선수 생활 이후 제2의 인생에 대한 불안이 여전하다. 비단 프로 리그, 야구만의 문제가 아니라 엘리트 육성 위주 한국 스포츠계의 고질적 병폐이기도 하다. 최근 경주시청 팀 소속 트라이애슬론(철인 3종 경기) 故 최숙현 선수 사건 사례처럼 이런 악순환이 여전히 존재함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현실을 반영한 것인지, 여성 주인공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스포츠 영화는 국내에서 지극히 드물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여자 핸드볼 은메달 팀의 이야기를 극화한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감독 임순례, 2008) 정도가 국내에선 극히 드물게 알려진 작품이다. (실상 해외 작 중에서도 그리 흔하진 않다) 약 한 달 전, 참 오랜만에 그런 영화가 개봉했고 소소한 화제가 되고 있다. 이번에 소개할 영화 <야구소녀>(감독 최윤태, 2019)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2_ 첫 번째 주인공, ‘주수인’ 이야기

 

"야구소녀" 영화 스틸 이미지
“야구소녀” 영화 스틸 이미지

“사람들이 내 미래를 어떻게 알아요? 나도 모르는데…”

“전 해보지도 않고 포기 안 해요”

작품 홍보에서 가장 앞줄에 뜨는 카피다.

<야구소녀>의 주인공은 고교 야구선수 주수인이다. 그녀는 소속 팀을 포함 전국에서 유일한 등록 고교 야구 선수이다. 영화 초반에 신임 코치에게 그녀를 소개하는 감독의 말처럼, 최고 구속 134km로 공을 던져대는 세계에서도 몇 안 되는 여자 야구선수다.

하지만 그녀의 희소성은 실 전력감을 냉정하게 저울질하는 프로팀에 별 의미가 없기에 주수인은 트라이아웃(예선 경기) 기회조차 잡기 어려운 상황. 경제적으로 무능력한 남편 때문에 가장 역할에 찌든 어머니, 현실적으로 진로를 잡아줄 책임이 있는 감독, 아이돌 가수를 꿈꾸는 친구까지 모두 그녀를 말리는 중이다. 주수인과 주니어 야구단부터 쭉 같이했던 동기는 프로팀과 계약하고, 그녀는 더욱 세상을 원망하며 폭주한다. 이때 새로운 코치가 팀에 가세하고 주수인과 신임 코치는 아옹다옹 다투며 서로를 알아가기 시작한다.

‘주수인’ 역을 맡은 이주영 배우는 중성적인 매력이 돋보이는, 영화와 방송계의 주목받는 아이콘이다. <야구소녀>는 이주영 배우가 현재까지 쌓아 올린 이미지를 극대화한다. 주수인의 초반은 돌파구를 찾지 못한 채 야구밖에 모르는 처지 그대로 막무가내다. 130km대의 구속은 분명 여자 선수로서는 독보적이지만, 그녀가 진출하고픈 프로야구에선 그저 별난 캐릭터일 뿐 흥미를 끌 수 없는 성격의 것이다.

주수인은 구속 150km를 던지면 되지 않느냐며 맹목적으로 도전한다. 다른 선택지가 없다. 세상에 대한 원망과 불만으로 공회전하는 셈이다. 주변 인물들은 현실의 장벽이 그녀가 뛰어넘기엔 너무 높다는 걸 알기에 그녀가 어서 포기하길 바란다. 하지만 주수인은 ‘청춘 스포츠 만화에서 튀어나온’ 캐릭터인지라, 프로선수로서의 성공과 명예가 아닌 그저 좋아하는 걸 계속하고픈 일념뿐이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약점인 구속의 성장 한계를 커버하기 위해 숨겨진 강점이던 공의 회전력을 갈고닦는다. 이 부분은 무척 상징적이다. 필살기를 갈고닦는 과정은 그 자체로 강자에 맞서기 위한 약자의 방법론으로 승화된다. 강속구 투수가 되기 위해 구속을 올리려는 무지막지한 연습 과정이 남녀 성대결의 면모를 보인다면, 후반 너클볼 수련 과정은 부드러운 직선처럼 목표를 이루기 위한 지혜의 순간이다. 결정적 순간에 가장 정공법이라 할 직구 승부를 펼친다. 영화 속 현실에서 부당한 세상에 맞서는 방법을 터득하며 그녀는 계속 성장해간다. 진정한 포효는 바로 그 순간에 발현된다.


2_ 또 다른 ‘주수인’들, 혹은 각자의 방법으로 벽을 넘는 존재들

주수인은 후반 훨씬 안정되고 미래가 보장된 제안을 거부하고 도전을 계속한다. 코치가 주수인의 어머니에게 넌지시 말하듯, 이제 더 가혹한 현실에서 프로선수로 살아남기 위한 2라운드가 그녀에게 시작되었을 뿐이다. <야구소녀>는 주수인의 길만 옳다고 강변하지 않는다.

여자 야구선수의 진로에서 주수인과 대척점을 이루는 존재가 그녀가 다니는 학교의 교사로 재직 중이던 국가대표 여자야구선수다. 여자야구 국가대표라도 사회인 야구로 분류되며 야구를 생업으로 하는 걸 포기한 상태다. 하지만 야구를 사랑하는 일본어 교사 또한 시합 출전을 위해 밤샘 일 처리를 하거나 모두 전지훈련을 떠나 포수가 없는 상황에서 시간을 쪼개 주수인의 볼을 받아주는 등 조력을 아끼지 않는다. 영화 속 주수인의 선택이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겨준다면, 교사의 판단은 좋아하는 걸 하기 위해 많은 걸 포기해야 하는 현실의 제약을 인정함과 동시에 꿈을 포기하지 않기 위한 결단으로 조명된다.

 

"야구소녀" 영화 스틸 이미지
“야구소녀” 영화 스틸 이미지

주수인의 친구이자 가수를 꿈꾸는 친구는 이 세계의 룰을 잘 안다. 열심히 연습하지만, 아이돌 성공 법칙이라는 현실의 장벽 앞에 그녀는 자신의 진면목을 보여 줄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 외모도 백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쓸쓸히 좌절하려던 순간 주수인의 고집이 작은 결실을 맺고 그녀 또한 다시 도전을 다짐한다.

주수인이 정말 어렵게 기회를 얻은 프로구단 트라이아웃 현장의 ‘유이’한 여자 도전자로 등장한 재미교포 여자 선수 또한 만만치 않은 실력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처지의 남자 선수들에게 비아냥과 조롱의 대상이 되어 상처받을 때, 뜻밖에 활약하는 주수인을 보며 고무된다.

그러나 이 영화의 미덕은 여남 성대결로 몰고 가는 방식을 넘어 트라이아웃에 참여한 선수들이 성별 가리지 않고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듯 험난한 길을 걷게 된다는 측면을 잊지 않고 공평하게 풀어낸다는 점이다. 주수인의 깜짝 활약에 여남 없이 환호하는 선수들의 장면은 그 지점을 관통한다.

<야구소녀>에는 시련은 있어도 주인공을 일방적으로 괴롭히는 악인은 없다. 각자의 경험과 목적이 있고, 업무에 충실할 뿐이다. 약간의 편견은 있지만, 그것은 악의나 혐오라기보다는 우리 사회가 가진 고정관념에 가깝다. 주수인, 코치 진태와 삼각관계를 조성하는 주수인의 어머니 또한 그녀의 처지에서 많은 꿈을 포기한 채 가정을 지키기 위해 일상의 사투를 거듭해나가는 존재다.

 

3_ ‘상업영화’의 모범적 사례, <야구소녀>


대개 독립영화들을 소개하려 노력해왔지만, <야구소녀>는 저예산 상업영화로 생각하고 분류했다. 독립영화에서 선악이 모호한 면모를 보이는 주인공, 해피엔딩보다는 어두운 현실에 대한 묘사와 반영, 여남 차별이나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강조 등의 요소가 분명 진하게 들어있지만, 그것이 결정적으로 작용하지는 않는다.

꿈을 좇는 주인공과 그 주변에서 각자의 견해를 취하지만 주인공을 종국에는 지지하게 되는 배경 인물들, 결말을 짐작하면서도 긴장감을 유지하는 극적으로 집중된 전개, 그리고 노력하는 마이너에 대한 온정적 태도 등 상업영화 공식을 충실히 따르는 작품이다. 그렇기에 결말 부도 나름대로는 해피엔딩에 가깝다. 상업영화에서 거의 판타지 급으로 조미료를 뿌려대는 것과 비교하면 기본양념을 추가한 정도에 가깝다. 105분이라는 러닝타임 평균을 넘을락 말락 하는 시간 동안 이야기는 질주하는 기차처럼 집중력과 흥미를 잃지 않는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같은 극단적 반전이나 파격 설정에 기대지 않으면서도, 여성 서사를 가미한 청춘 스포츠물의 왕도적 전개를 구현한 수작이다.

청춘물+스포츠 물+여성 영화의 조합은 조금만 어그러지면 머리 셋 달린 케르베로스가 되기에 십상인데, 장편 연출이 처음인 최윤태 감독의 연출 솜씨가 나쁘지 않다. 앞서 언급했듯 억지로 소비되는 캐릭터가 거의 눈에 띄지 않는 것도 이 작품의 장점이다. 공부 못한다고 닦달하는 담임선생도, 동병상련 역할인 일본어 교사와 또 다른 여자야구선수도, ‘슬램덩크’의 안 선생님 실사판인 감독과 코치도, 선의의 라이벌과 또래 친구들도, 현실적 계산과 작은 배려의 태도를 겸비한 선수 스카우터와 단장, 감독들도, 트라이아웃 현장에서 출신과 성별을 떠나 4% 안에 들어가려는 꿈을 좇는 엑스트라 선수들도 제각기 고유한 위치와 몫을 차지한다. 상투적 악역 없이도 영화는 매우 흥미진진하다.

눈썰미가 좋은 이들이라면 더 잘 보일 소소한 소품의 활용도 적절하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몇 개의 글러브, 아이스크림, 화분과 상장, 싸인 볼, 특히 매니큐어가 영화의 여운과 함께 해석의 여지를 풍부하게 해준다. 한편, 주수인을 가로막는 벽들-수군거리며 깔보는 남성 선수들, 라커룸을 대신하는 화장실 한 칸, 기회인 동시에 압박으로 다가오는 프로구단의 위압감 넘치는 사무실과 구장 마운드는 영화가 끝나면 그녀가 직면할 세상의 풍경이다.

 

"야구소녀" 영화 스틸 이미지
“야구소녀” 영화 스틸 이미지

4_ 독립영화와 상업영화 경계의 미덕, <야구소녀>

<야구소녀>가 저예산 상업영화의 미덕을 갖췄다는 건 결코 폄하가 아니다. 표현의 자유가 더욱 폭넓게 보장된 독립영화보다 상업영화는 온갖 제약이 많다. 하지만 좀 더 넓은 세상에서 작가가 구현하고픈 비전과 시도하고 싶은 실험을 위해 어느 정도 타협을 고민하고, 예술가의 결기를 갈고닦아 면밀한 자기 관리에 이르는 것은 상업영화의 크고 안정된 조건을 누리기 위해 갖춰야 할 미덕이기도 하다.

<야구소녀>는 꿈을 포기하지도, 꿈만 고집하지도 않은 영화 속 주수인이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이어나갈 세상과의 싸움을 담고 있다. 이 사회와 기성세대가 강요하는 검증된 방식 혹은 숨 쉴 틈 없는 현실에 부속처럼 편입되기를 거부하는 청춘에 관한 영화이다. 한국의 엘리트 육성 중심의 스포츠 현실에 대항해 무엇인가에 자신을 바치는 순수한 열정의 가치를 긍정하는 스포츠 영화이기도 하다. 또한, 선수 개인이 가진 가능성을 포착하기보다 고정관념에 매몰된 기존 관습 때문에 주수인이 겪는 유리천장의 문제를 제기한다. 치열한 논란과 ‘백래시’에 직면하면서도 여성 서사가 한발 두발 전진하는 현실을 반영하는 여성 영화로도 흥미로운 작품이다.

영화 <야구소녀>는 개봉 한 달이 지났고, 작지 않은 반응을 일으키고 있다. 야구팬이건, 가족동반 관람이건, 여성 서사를 찾건 평균 이상의 만족과 잔향을 얻을만한 괜찮은 영화다.

 

작품 정보


야구소녀 Baseball Girl

한국, 드라마, 2019
2020.06.18. 개봉, 105분, 12세 관람가
감독 최윤태
주연 이주영, 이준혁, 염혜란
출연 곽동연, 주해은, 김종수, 이채은, 송영규, 박연수, 장유, 허정도, 원혜련

24회 부산국제영화제(2019) 초청(한국 영화의 오늘-파노라마)
45회 서울독립영화제(2019) 독립스타상(이주영)

 

"야구소녀" 영화 포스터 이미지

 

관련기사

저작권자 © 뉴스풀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