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이민 정서와 난민 불승인이 초래한 21세기 신종 질환의 그림자

 

"체념 증후군의 기록" 포스터 이미지(넷플릭스)
<체념 증후군의 기록> 포스터 이미지. 넷플릭스

1_ ‘체념 증후군’, 들어보셨나요?

 

2003~2005년부터 스웨덴에서 ‘체념 증후군’이란 신종 질환이 보고되기 시작했다. 타국에서도 차츰 유사 사례가 등장하기 시작해 온전히 스웨덴만의 사례는 아니다. 하지만 현재까지는 스웨덴이 독보적으로 많은 질환자를 배출하는 중이다. 이 질환의 특징은 점점 신체활동이 느슨해지다가 완전한 가사상태로 빠진다는 것이다. 즉 ‘코마’ 상황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오해와는 다르게 그 자체로 죽음에 이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스스로 먹거나 마시는 행위 혹은 배설 활동까지 멈춰버린 셈이라 주변의 케어가 필요한 상황에 빠진다.

이 기이한 질환의 주 발생 대상은 유·청소년층이다. 체념 증후군은 뚜렷한 발생 원인이나 매개체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그저 심리적인 요인이라는 추측만이 있을 뿐이다. 다만 주요 경향으로 확인되고 있는 건 특히 난민 가정의 아이들에게서 체념 증후군 발생이 확인된다는 점이다. 물론 ‘식물인간’이 되는 경우는 다양하지만 난민 아동들에게만 집중적으로 발생하며 그 발생 과정에서 외부적 요인이 증명되지 않는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특히 21세기 들어 유럽의 난민 위기가 전 세계적인 이슈가 되는 것은 물론 유럽 정치계에서 가장 큰 화두의 하나로 자리를 잡고 정치 지각변동을 일으키는 상황에서 신종 질환의 원인과 해법 논쟁은 그 자체로 정치적 의제가 되어간다.

워낙 알고 보면 충격적인 질환이기에 몇 편의 다큐멘터리에서 체념 증후군을 소개한 바 있다. 하지만 대개 독립영화로 제작되어 영화제 외에는 국내에서 소개될 기회가 사실상 부재했었다. 하지만 넷플릭스가 직접 제작해 2020년 제92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단편 다큐멘터리 부문 후보(세월호 사건을 다룬 이승준 감독의 <부재의 기억>도 같은 해 해당 부문 후보였다)로 올랐던 <체념 증후군의 기록>은 대중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국내 최초의 관련 작품이 될 것이다.

 

2_ 세 가족의 사례

 

영화는 세 가족의 사례를 차례로 소개하기 시작한다.

첫 번째는 ‘다리아(다샤)’ 가족이다. 7살 소녀는 5개월 전부터 체념 증후군 상태로 잠자듯 누워 있다. 소녀의 가족은 지역 인터넷 공급 망 서비스를 운영하던 아버지가 정부의 인터넷 검열 요구를 계속 거부하다 체포되고 가족까지 감시와 고문에 노출되자 탈출해 스웨덴에 망명을 신청했지만 거부된 후 항소한 상태다. 소녀는 점점 일상적인 반응이 둔감해져 간다.

두 번째 케이스는 ‘카렌’ 가족이다. 12살 소년은 6개월째 체념 증후군 상태다. 그의 가족은 13개월 동안 유효한 임시체류 허가증으로 스웨덴에 머무는 중이다. 가족의 아버지는 범죄단체의 살인 증거를 알게 된 바람에 생명의 위협을 겪다 탈출했다고 한다.

세 번째로 ‘레일라’ 가족이 등장한다. 10살 소녀는 7개월 전부터 누워있다. 중동의 소수민족인 야지디 종족인 그들은 명예살인 악습의 희생양이 될 처지가 되어 온 가족이 탈출해야 했다고 한다. 하지만 역시 망명 신청 거부로 추방 명령이 내려져 항소 진행 중인 상태다.

 

"체념 증후군의 기록" 스틸 이미지(넷플릭스)
<체념 증후군의 기록> 스틸 이미지(넷플릭스)

이들의 공통점은 쉽게 확인된다. 이들의 고향은 중동과 구소련 중앙아시아다. 난민이 대거 발생하는 전형적인 지역이다. 아이들은 어린 나이에 익숙한 고향을 강제로 떠나 하루 앞을 알 수 없는 유랑과 위기에 노출된 가운데 온갖 천신만고 끝에 간신히 북유럽의 평화로운 땅, 스웨덴에 도착했다. 운이 좋다고 볼 수 있겠지만 이들은 스웨덴에 정착하지 못하고 언제라도 다시 국경 밖으로 내보내질 상황이다. 다른 난민 아이들보다 겉으로 보기엔 이 아이들의 상태는 제법 양호해 보인다. 일단 당장의 안전과 생활이 가능한 형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랜 고생 끝에 겨우 안주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땅에서 다시 추방될 거란 공포는 오히려 더 극단적인 심적 파탄으로 아이들에게 돌아와 버렸다. 심지어 아이 중 한 명은 학교에서 자신이 곧 추방당해 본국으로 강제 송환되면 가족들과 함께 살해당할 거라며 갑자기 울기 시작하고 놀란 급우들이 함께 엉엉 우는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고 한다. 본인과 가족은 물론 주변에 파장이 확산하는 셈이다.

사람이 정신을 놓아버리는 상황은 역설적으로 맨정신 갖고는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처해졌기 때문에 일어난다. 극한의 스트레스를 더 겪을 수 없기에 정지해 버리는 것이다. 체념 증후군은 곰의 동면과 경우는 다르지만 비슷한 결론에 도달한다. 곰이 극한의 겨울을 견뎌내기 위해 수천 년에 걸쳐 종 차원의 목숨을 건 실험을 통해 완성한 특유의 습관이 동면이다. 초기엔 동면을 시도했다 실패해서 그대로 죽어버린 사례가 많이 발견되었다고 한다.(어쩌면 체념 증후군이 해소되지 않고 자리 잡으면 이런 형태로 변형되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아이들은 자신과 가족에 닥친 불운이 걷히길 그저 기다릴 뿐이다. 다른 저항수단이 있을 턱없는 아이들의 소극적인 방어(혹은 저항) 수단인 셈이다.

 

3_ ‘가짜뉴스’ 이면의 정치적 선동과 확인된 진상

 

초기에 체념 증후군이 보고되기 시작하자 스웨덴 여론이 들끓었지만 격렬한 논란이 터졌다고 한다. 아이들이 동정심을 사기 위해 연기를 하고 있다거나, 끔찍하게도 부모들이 아이를 희생시켜 난민 자격을 얻기 위해 독을 먹이는 자작극이라는 등의 차마 입에 담기 힘들 온갖 유언비어가 횡행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아무리 조사를 거듭해도 체념 증후군이 인위적 조작이 아니라 실재하는 질환이라는 게 증명되자, 이 ‘가짜뉴스’는 악의적 선전임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겉으로는 논리를 따지지만, 그 본심은 한번 찍히면 뭘 하건 미워하고 적대하는 혐오 세력의 전형적인 수법이다. 미움의 대상은 무슨 짓이라도 할 거라는 악마화의 전형적 사례다.

역설적으로 스웨덴이 상대적으로 난민에 개방된 사회정책을 유지해 왔기에 이런 달갑지 않은 신종 질환의 최초 발생국이 되었을지 모른다. (스웨덴의 인구 대비 25%가 동유럽과 인접국 출신 이민자와 그 후손들이다) 애초 난민을 아예 안 받았으면 일어나지도 않았을 문제 아니냐는 주장이 자연스럽게 튀어나오기 좋은 환경이다. 현재 유럽에서 발호 중인 극우주의가 자리 잡기에 좋은 조건이라 현재 스웨덴의 反이민-反이슬람 정당인 ‘스웨덴 민주당’은 ‘사회민주당’, ‘중도당’과 함께 3대 정당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복지국가 스웨덴의 이미지로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지만 오히려 기존 복지국가를 유지해야 한다는 절박감에 저소득층-노동계급이 더 이런 극우정당에 지지표를 던지는 현상이 유럽 곳곳에서 드러나는 중이다.

 

"체념 증후군의 기록" 스틸 이미지(넷플릭스)
<체념 증후군의 기록> 스틸 이미지. 넷플릭스

하지만 멀리 갈 것도 없다. 국내 인터넷 뉴스 댓글 창에서 이런 부류의 악선전은 무수하게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혐오 발언은 선후가 뒤바뀐 소리다. 스웨덴에서 체념 증후군이 보고되기 시작한 시기는 하필 스웨덴을 비롯해 난민 유입에 전향적이던 유럽 내 분위기가 경색되기 시작하던 때와 겹쳐진다. 반이민 정서가 팽배하자 정치권에선 망명 정책을 까다롭게 바꾸고 진입장벽을 높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안전과 처우 면에서 가장 확고한 유럽을 향해 몰리는 난민들에겐 다른 대안이 없다. 그들이 떠나온 고향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4_ 근본대책 없이 해결될 수 없는 체념증후군

 

제작진의 카메라는 약 반년 후 다시 세 가족을 찾아간다. 어떤 변화가 있을까, 기대와 걱정 가운데 이들 앞에 근황이 공개되기 시작한다.

다리아는 10개월 동안 여전히 누운 채 그대로지만 가족에겐 희소식이 생겼다. 거주 승인을 받은 것이다. 아마 정치적 망명으로 간주될 측면이 있기 때문일 테다. 가족은 침대의 다리아에게 승인 허가서를 읽어주며 기쁨에 젖는다. 카렌은 14개월째 침대에 있지만 아주 약간은 신체 활동이 돌아온 상태다. 그는 걸쭉한 음식과 액체는 섭취가 가능해졌다. 그의 가족은 망명 신청을 다시 청구할 예정이다. 소년의 부친은 전업 일자리를 구해 일할 수 있어 다행이라 전한다. 레일라는 11개월째 별다른 변화가 없다. 하지만 가족에겐 또 다른 악재가 생겼다. 항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아 이들 가족은 언제든 추방이 가능해진 더 불안정한 상태로 추락했다. 더 나쁜 건 레일라의 언니인 첫째 딸에게도 체념 증후군 징후가 발현되기 시작했다는 사실.

결국, 체념 증후군에서 회복되기 위해서는 모든 질환이 그렇듯 원인이 제거되어야만 한다. 아이들이 그들을 스스로 가둬버린 원흉인 강제추방과 난민 생활의 공포를 떨쳐버리도록 하는 게 현재까지 확인된 유일한 치료수단인 것이다. 짧으면 몇 개월 만에 회복하는 경우도 있다고 의료진은 전한다. 다만 그들에게 다가온 호전된 상황을 질환자들이 느낄 수 있도록 꾸준하게 가족이 노력해야 한다는 전제가 붙는다.

다리아의 가족은 열심히 희망적인 분위기를 전하려 애쓴다. 비언어적 수단으로 모든 감각을 동원해 의사소통을 시도해야 한다. 곁에서 나누는 대화의 긍정적 말투, 친밀한 어루만짐, 24시간 내내 머무는 방의 분위기 조성 등 모든 지점에서 희망을 느끼게 가꿔야만 하는 난제가 가족들에게 부여된다.

 

<체념 증후군의 기록> 스틸 이미지. 넷플릭스

5_ 반反이민정책과 고립주의가 탄생시킨 괴물에 맞서다

 

다시 6개월여 시간이 흘렀다. 늘 ‘잠자는 숲속의 공주’였던 다리아는 1년 넘게 체념증후군 상태였던 상황이 호전되어 비록 가사상태 시간을 기억하진 못하지만 이제 일상생활에 복귀하고 학교에도 다니고 있다. 안정된 거주환경과 가족, 또래 아이들과의 관계를 회복한 소녀는 이 신종 질환의 극복 수단을 자신의 존재로 증명하는 면역체로 영화 속에서 희망의 상징이 된다.

하지만 영화가 마무리되며 올라가는 자막에선 최근 3년간 스웨덴에서만 200명 이상의 신규 증상 사례가 확인되었음은 물론, 외딴섬 격리정책으로 악명 높은 호주의 난민수용소에서도 같은 사례가 보고되기 시작했다는 음울한 소식이 전해진다. 세계가 직면한 새로운 난관과 위기는 신종 질환도 출현시켜낸다. 다음엔 또 무슨 괴이한 존재가 등장할지 감히 측량할 수 없는 현실이 두려워지는 순간이다.

내전과 기아로 인해 과거보다 난민의 개념은 비약적으로 확장하는 중이다. 대부분의 국가가 ‘경제난민’의 수용을 거부하고 있다. 난민들의 고국이 빈곤하게 된 원인을 분석하고, 이주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고려한다면 억제만으로 해결될 일은 아니다. 그리고 ‘기후난민’이 21세기 들어 본격적으로 발생하기 시작해 새로운 악재가 되어간다. 고향을 강제로 떠나 생존을 위해 그들을 반길 리 없는 타국을 떠도는 난민의 처지가 안 어려울 리 없겠지만, 특히 안정된 환경에서 성장하고 교육받아야 할 아이들에게 미치는 타격은 미래를 파괴하는 행위일 테다. 체념 증후군의 발견은 이런 21세기 지구촌에 닥친 또 다른 과제의 심각성을 증명하는 생생한 예시다.

 

 


작품 정보

 

체념 증후군의 기록 Life Overtakes Me

2019, 스웨덴·미국, 다큐멘터리

2019. 6. 14. 공개, 39분, 12세 관람가

감독 존 햅터스, 크리스틴 사무엘슨

제공 넷플릭스 오리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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