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현재 전국 방방곡곡에 숨겨진 ‘금정굴’을 찾아서

 

“금정굴 이야기” 스틸컷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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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_ 역사는 힘 있는 자가 쓰는가?!

 

역사는 공명정대할 것 같지만 실은 편파와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철기 시대순으로 도구의 재료에 따라 선사 시대를 구분하고 있지만 그런 도구들은 주로 사냥에 나선 남성들의 것으로 상대적으로 오래 보존되는 재질 때문에 후대에 자료로 쓰이는 데 가깝다. 당시에 사냥은 효율성 측면에서 그렇게 썩 좋은 식량 확보 수단은 의외로 되지 못했고, 채집 활동이 큰 비중을 차지했었다. 그러한 채집은 대개 여성들이 전담했고, 채집의 성과는 썩으면 없어지는 재료로 만든 바구니 등으로 운반 및 보관되었다. 훗날 초기 농경이 벌어질 때 역시 그랬을 테다. 인류 초기의 가족과 부족들은 모계 사회인 경우가 많았다는 것 정도는 일찍이 상식으로 자리를 잡은 상태다. 하지만 우리가 떠올리는 선사 시대의 이미지는 여전히도 대개 건장한 사냥꾼과 그들의 보호가 없다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연약해서 보호가 필요한 부녀자와 노약자의 군상이다.

로마 시대의 기록 말살 형벌은 말 그대로 권력투쟁에서 밀려나 폐위된 황제의 존재를 지워버리는 처벌이다. 공식 기록에서 삭제하고 동상이나 기념주화 등도 훼손해버리는 식이다. 진시황의 분서갱유 역시 사상통제의 하나였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중국의 유학자들은 목숨 걸고 서적을 은닉했기에 다행히 학문은 이어질 수 있었지만, 한동안 숨겨둔 경전이 뒤늦게 발견되거나 해석이 가능한 이들이 사라지는 바람에 훈고학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초래하기도 했다. 그런 대규모 사상통제는 유구한 전통 속에 계승 발전되었다. 명과 청 왕조 시절에는 ‘문자의 옥’이라는 대규모 탄압이 벌어지는 동시에 유화책 겸 사상통제를 위한 회유로 대규모의 백과사전 편찬 또한 병행되었다. 서구 역시 금서의 문화사는 곧 근대 이후 지성사의 그늘처럼 따라붙던 존재였다.

20세기 이후에는 정보 전파의 세계화로 이런 획일적 통제는 없어졌을 거라 흔히들 생각하지만 2022년 현재도 곳곳에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정보 은폐와 역사 왜곡이 이뤄지는 중이다. 히틀러의 나치가 집권한 후 비독일적인 게 무엇인지는 몰라도 나치당이 규정하는 건 폐기해야 한다는 선동에 지성의 전당이라던 대학에서 교수와 학생들이 책을 쌓아놓고 불을 질렀다. 그 경악스러운 장면에 누군가는 “책을 불태운 곳에서는 머지않아 사람도 불태울 것이다.”라고 예언했고 끔찍하게도 그 예언은 현실이 되었다. 유독 20세기 현대에 들어서 ‘제노사이드’라는 개념은 빈번해졌다. 가장 이성과 합리가 발전한 시기에 반인륜적 대량학살이 더 잦아진 것이다.

순서의 선후는 있지만, 제노사이드와 역사 왜곡 및 통제는 서로 거울처럼 앞서거니 뒤서거니 따라붙는다. 자신들의 전쟁범죄를 은폐하고픈 자와 그로 인해 이득을 취한 자는 자신들의 과거가 공개되길 원치 않는다. 반대로 이익을 취하기 위해 죄 없는 타자를 적으로 규정하고 악마화해 희생 제물로 바치려는 자들은 치밀하게 피아를 구분하고 상상 속의 적을 창조한다. 우리 내부의 모순과 부조리는 일순간에 외부의 적 탓으로 돌려지고 우리 자신에겐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면죄부를 준다. 그리고 귓가에 속삭인다. “너는 누구의 편이냐?”

 

“금정굴 이야기” 스틸컷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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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_ 20세기 한국의 국가폭력과 야만

 

불과 70여 년 전, 1950년 전후의 한국은 딱 그랬다. 1945~1953년, 해방 이후 8년 동안 남북한이라는 형성 과정의 국가는 그 국민을 위함이 아니라 무소불위의 잔인한 악신과도 같았다.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무능하기 짝이 없었지만 수탈하고 괴롭히고 죽이는 데에는 지독하게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던 체제였다. 그 절정은 한국전쟁이다.

3년의 전쟁 동안 대규모의 양민 학살이 곳곳에서 자행되었다. 남북한 두 체제가 모두 거리낌 없이 자국민을 학살했지만, 주요 전장이 남한 일대였던 탓에 학살의 희생자는 태반이 남한에 속한 이들이었다. 공식적인 조사로 제주 4.3사건부터 한국전쟁 마지막까지 좌우익의 학살을 단순히 숫자로만 놓자면 우익 대 좌익이 10 대 1에 달한다고 할 정도다. 이는 반공을 국시로 한 이후 독재정권들에게 곤혹스러운 사실이었기에 철저하게 금기시되었다. 가해자에 속했던 이들이 이후 반세기 동안 남한 내에서 기득권화되었기에 더욱 언급하면 안 되는 사안이 된 셈이기도 하다. 4.3부터 보도연맹, 노근리, 거창, 경산 코발트 광산… 남한 곳곳에서 아직 유해라도 발굴되어 온전히 매장되지 못한 유골과, 그에 깃든 채 떠나지 못한 원혼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

생존자와 유가족은 이제 대부분 세상을 떠났고 그 직계 친족과 후손은 최소한 70~80대의 초 고령자가 되었다. 이제 조금만 더 망각의 강이 흘러간다면 학살의 가해자들은 아무 근심이 없어지게 될 테다. 스페인이나 라틴아메리카에서 벌어진 정치적 제노사이드가 대부분 ‘침묵 협약’에 의해 직접적 고문과 학살을 직접 실행한 범인 일부를 제외하면 죄를 덮어주기로 한 뒤 겨우 민정 이양과 절차적 민주화를 이행할 수 있었던 것과 비슷한 상황인 셈이다.

그렇기에 70여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굳이 시시비비를 가려 가해자를 처단하려는 것도 아닌데 유해발굴이나 진상 규명을 하면 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누구나 상식적으로 쉽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일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과거의 역사는 현재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좌우 이념 대립으로 인한 학살이라 손쉽게 단정할지 모르지만 밝혀진 당시 상황 일부만 확인해 보더라도 당시 국민 대부분이 문맹이던 남한 땅에서 사회주의니 자본주의니 이념 구분을 제대로 할 줄 아는 이가 얼마나 있었겠는가. 그 결과 공무원 실적 채우기에 동원되어 쌀 한 말 비료 한 포대 준다고 하기에 서명했다가 졸지에 보도 연맹원이 되어 죽어 나간 이가 부지기수다.

그리고 엄연히 연좌제가 사라졌는데도 부역자의 가족까지 학살을 당했다. 정식 재판도 없었을뿐더러 주변 이웃과 사이가 안 좋았다거나 재산을 노린 밀고가 허다했다. 어디서 많이 보던 상황 아닌가. 바로 마녀사냥이다. 증오는 증오를 낳고 피는 피를 불렀다. 지금도 지리산 산골에는 수십 년째 원수처럼 지내는 이웃들이 존재할 지경이다. 그런 삼천리 방방곡곡의 지옥도 중 경기도 고양 금정굴이 있다. 정확히는 1950년 10월 1달 동안 경기도 고양군 송포면 덕이리 금정굴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금정굴 이야기” 스틸컷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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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_1950년 10월, 금정굴에서 일어난 일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경기도 고양 일대는 남북한 접경지대였다. 전쟁이 발발하자 수도 서울과 같은 날, 불과 3일 만에 인민군의 수중에 떨어진 이 지역에는 인민위원회가 들어선다. 우익에 대한 박해가 일어났고 인민군에 저항하는 우익 유격대에 대한 잔혹한 보복도 이뤄졌다. 3달 후인 9월 28일, 전세가 역전되자 인민군이 사라지고 남한 정부의 행정체계가 공백인 상태가 며칠간 이어진다. 양측 세력의 살상은 끊이지 않았다. 10월 이후 고양경찰서가 활동을 재개한 뒤부터 부역자 색출이 이뤄진다. 국민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채 3일 만에 한강철교를 폭파하고 도주했던 정부의 행태는 대충 이랬다.

당연히 그 진행 과정이 공정하리라 애초 기대할 수 없긴 했지만, 그 실상은 더욱 참혹했다. 우익 치안대와 반공 유격대 출신들이 개인적 복수심에 무차별한 색출과 연좌제로 무고한 이들까지 떼거지로 임의 구금된 후 정식 재판 없이 고문과 감금이 계속된다. 10월 6일부터 25일까지 20일간 10여 명 단위로 일제 당시 금을 캐기 위해 파 내려간 50미터 깊이의 수직갱도인 금정굴로 끌려간 희생자들은 즉결 처형당했다. 정확한 숫자는 집계된 바 없으나 천 단위로 추산된다. 우익 치안대는 희생자의 재산을 수탈했다. 이 광풍은 10월 말, 군‧검‧경 합동수사본부가 개입한 이후에야 중단되었다. 초법적 상황에 대해 당시 고양경찰서장을 비롯해 경찰관이나 치안대원 같은 공식기구 소속으로 처벌받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 (기록에 의하면 의용경찰대원과 시국대책위원장 단 두 명이 처벌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학살은 오랫동안 묻힌 채로 남아 있었다.

절차적 민주화가 진전되고 군부독재가 저물어가던 1990년대에 들어서야 유족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정부가 아닌 당사자들에 의해 1995년, 고양시청 녹지과 공무원들의 저지를 무릅쓰고 153구의 유해가 발굴되어 법의학적 확인 절차를 거쳤다. 그 결과 사건의 전모가 세상에 다시 환기되기 시작했다. 2005년 출범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금정굴 학살이 경찰에 의한 불법적인 집단학살 사건이라 공식 입장을 규정하고 최종 책임이 국가에 있다는 것을 명시했다. 그리고 과거사 화해를 위해 금정굴에 평화공원과 학살 희생자 유해를 영구히 봉인할 수 있는 위령시설 설치를 권고했다. 2007년에 해당 내용을 담은 진실규명 결정이 나왔다. 그리고 (영화제작 시점 기준) 14년이 흘렀다. 여전히 국가기관 권고사항임에도 평화공원과 유해 안치소는 건립은커녕 기초공사도 들어갈 기미가 없고, 학살의 희생자 유해도 추가로 발굴되지 못한 상태다.

 

“금정굴 이야기” 스틸컷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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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_ 2022년, <금정굴 이야기>

 

영화 이야기는 하지 않고 역사 풍월만 늘어놓았다. 하지만 이런 배경 없이 <금정굴 이야기>를 독해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굳이 한국전쟁과 현대사를 독해하진 않더라도 국가폭력과 제노사이드에 대해 개념을 잡고 있다면 서슴없이 건너뛰고 바로 영화를 찾아보면 될 일이다.

그 모든 교과서적 내용이 애니메이션과 다큐멘터리를 결합해낸 이 십여 분 분량의 단편 작업에 오롯이 담겨 있다. 물론 이 작품은 교육 동영상은 아니다. 텍스트로 가득 찬 정형화된 영상문서와 본 작품은 거리가 멀다. 그 대신에 예술가의 사회적 발언이 응당 취하는 방법론에 따라 상징과 은유를 통해 수많은 텍스트와 이미지를 조합해 과연 지금까지 어떤 일이 일어났으며 무엇이 이행되지 않았는지를 밝히기 위해 스스로 증거가 되고자 한다.

최근에 일어난 상영 불허 논란 때문에 <금정굴 이야기>가 대체 얼마나 충격적인 내용과 표현이 담겼나 겁이 나기도 했었다. 이 단편은 작년부터 국내외 여러 영화제에서 상영되고 좋은 평판과 수상 결과를 거듭 알려오는 중이다. 하지만 공중파 방송과 연계된 모 영화제에서 본 작품이 초청되어 극장에선 상영했지만, 영화제의 주관인 방송국 공중파 채널 방영은 심의위원회에 의해 방영을 며칠 앞두고 거부되었다. 감독은 이에 항의하며 영화에 담긴 내용이 근래 학계 연구 성과를 그대로 반영한 지극히 교과서 수준 내용이라 밝혔다. 그리고 참고도서와 자료를 공개했다. 하지만 끝내 방송 불가 조치가 시정되지는 않았다.

내용이 그렇게 극단적이지도 않다면 눈 뜨고 보기 힘든 잔인한 내용이라도 숨어 있는 걸까? 호기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실제로 마주한 영상은 아주 충실하게 역사적 연구 성과를 반영한, 딱 예상했던 평균치의 작업이었다. 아니 이 정도가 대체 뭐가 문제일까. 역사의 승자로서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신한다면 오히려 이 정도는 승자의 아량이나 관용에 속하는 수준 아닌가. 이게 불편하다면 그것은 그들이 끄집어내기 두려워하는 무엇인가가 숨겨져 있다는 반증일 테다. 결국, 제대로 된 과거사 평가와 규명이 없이는 화해도 성찰도 불가능하다는 게 증명되어버린 셈이다. <금정굴 이야기>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내용을 담은 조금 실험적인 15세 관람 대상 작업은 2022년 현재 대한민국의 부끄러운 수준을 입증하는 거대한 해프닝의 중심에 선 작업이 되어버렸다.

 


작품 정보

금정굴 이야기 Korean Genocide

2021, 한국, 애니메이션·다큐멘터,18분

감독 전승일

2021 10회 뭄바이단편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애니메이션)

헝가리 부다페스트 국제 영화제 최우수 단편 다큐멘터리상

2021 인도 Karukrit 국제 영화제에서 최우수 단편 다큐멘터리상

LA 독립 단편 영화제 최우수 웹 & 뉴미디어 부문 수상

체코 프라하 국제 영화제 최우수 단편 다큐멘터리상

2022 22회 서울국제대안영상예술페스티벌 한국작품상-한국 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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