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현, 〈삐삐언니는 조울의 사막을 건넜어〉, 한겨레출판 (2020)

 

조울병을 앓지 않았더라면 내가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들이 보내준 지지와 응원이 이처럼 마음 깊이 감사하지 못했을 것이고, 내가 얼마나 운이 좋은지 몰랐을 것이다. p253

 

어쩌다 또 질병에 관한 책을 서평으로 쓰게 되었다. 무겁지(?) 않은 번아웃과 같은, 정서적인 책을 선택해야겠다 싶었는데 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이끌렸다는 말이 맞겠다.

 

한겨레 출판, 이주현, 2020

 

시를 읽으면 의미가 와락 덤벼들 듯 통째로 이해됐고, 구절과 구절 사이 시인이 숨겨놓았을 감정이 세세히 떠올랐다. 속도가 너무 빨라 불안하면서도 황홀했다. p25

종이를 집어 들면 손가락 지문으로 종이의 질감을 느낄 수 있었고, 음악을 들으면 음표가 귀에 내려꽂혔으며, 꽃향기는 저 멀리에서도 내게 말을 걸었는데. p69

 

빨간머리 앤을 쓴 작가 루시 모드 몽고메리는 우울증을 앓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버지니아 울프와 헤밍웨이도 조울병을 앓고 있었고, 반 고흐는 변덕스러운 기질로 유명했는데 자신의 왼쪽 귓불을 자르고 망상에 시달렸다. 천재라 불리는 예술가들의 섬세한 감각 뒤엔 조울병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오랜 절친이 우울증에서 벗어나는가 싶더니 잠을 자지 않고 먹지도 않았다. 모든 상황을 분노로 받아들였고, 화를 조절하지 못했다. 소비 욕구를 절제하지 못했고 나쁜 사람들과 어울렸다. 망상과 현실의 구분이 힘들어진 그녀를 강제 입원시키고 나서야 조울병이라는 늪에 빠진 것을 알았다.

나는 무엇이 문제인지 상담소에 상담이라도 좀 받으러 다니라고 윽박질렀었는데 그 무지함이 너무 창피해서 아직도 자책하고 후회한다. 친구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언젠가 해야 하기에 책을 더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약과 상담으로 단단히 죄어오는 조울병의 고삐가 언제 풀릴지 몰라 두렵다. 그래도 나는 운이 좋다. 짜고 달고 쓰고 매운맛을 봤다. 때로 비릿함에 몸서리치기도 했다. 내 인생은 간이 잘 맞는다. p138

이 책에는 현직 기자인 작가가 자신이 앓고 있는 정신질환을 공개한다. 낮엔 태양으로 이글거리고 밤엔 영하로 기온이 내려가는 사막을 건너는 조울병, 작가는 해일이 이는 심연의 바다를 잠수하고 죽음의 수용소를 스스로 방문한다.

 

사진 박지영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아는 것은 병을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된다. 나를 재구성해 봄으로써 위기에 처했을 때, 감정이 극도로 고양됐을 때 또는 밑바닥으로 가라앉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그 패턴을 발견한다면 그다음 찾아올 조울병의 폭압에 방어하는 힘을 가질 수 있다. p79

 

우리나라 사람 1%에 존재하는 정신질환인 조울병은 하얀 어둠과 검은 우울로 표현한다. 작가는 조울병 같은 정신질환을 마음의 감기처럼 순화시킨 단어로 절제하기보다 병원과 가까워지고 좋은 의사를 만나 좋은 약을 찾는 것, 그리고 병과 마주할 수 있는 단호함을 가지라고 한다.

조울병은 ‘마음의 감기’가 아니라 뇌의 기분 조절에 문제가 발생하는 몸의 질병이다. 마음만 잘 먹으면, 의지만 있으면 해결되는 병이 아니다. 우울증이라는 정신질환의 인지는 긍정적으로 보편화되었다. 그러나 주변인의 우울증을 감지했을 때 ‘마음의 감기’는 ‘마음 병원’에 가보라고 쉽게 이야기하지 말도록 하자.

 

새 약은 풍선 끈에 달아놓은 돌멩이와도 같았다. 날개 달린 감정들이 하늘로 날아오르지 않도록 잡아줬다. 닻과도 같았다. 내가 원한다면 불안의 폭풍우를 피해 항구에 정박할 수 있었다. p166

 

DSM-5(미국정신의학협회에서 발행한 정신질환 진단분류표)에 의하면 조증과 울증을 동반하는 조울병은 양극성 장애에 해당한다. 중요한 것은 DSM-5에는 치료가 가능한 병의 진단을 범주에 넣는다. 조울병이 평생 약을 먹어야 하는 불치병으로 오해하는데 고혈압과 당뇨병도 평생 약을 먹으면서 자신의 상태를 조절한다.

조울병은 몇 년을, 몇 개월을 주기로 반복한다. 심한 우울증을 겪은 뒤 반사적으로 조증 상태가 야기된다. 반사회적 행동이 정당해지고 감정은 고조되고 에너지는 넘친다. 자신의 조증이 경계를 넘어서면 기분의 조절이 아니라 몸을 돌봐야 함을 의미한다. 병원을 찾고 약을 조절하고, 필요하면 입원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가까운 사람들의 관심과 위로, 응원은 조울병 환자에게 절대적인 힘을 준다.

 

공감과 격려, 객관적인 충고, 경제적 지원을 해줄 가족 같은 사람, 병원 진료 날짜와 치료제 복용을 확인하는 사람, 밖에 나가 햇볕이라도 쐬자며 침대에서 끌어내는 사람, 시시콜콜 사소한 얘기를 성의 있게 들어주는 사람, 그리고 ‘네가 어떤 사람이건 우린 너를 응원할 거야’라고 말하는 사람…. p207

지금의 내가 모두에게 중요한 사람일 필요가 없다. 나는 내게는 특별한 사람이다. 업무량을 줄이고 스트레스를 줄이자. 좋은 음식을 요리해 나부터 먹자.

 

조증이든 울증이든 핵심은 이거다. 괴로우면 의사를 찾아가라. p150

 

사막을 횡단하는 삐삐언니를 응원한다.

오아시스와 어린 왕자를 만날 수 있도록 나의 친구 y에게도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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