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그 뭐 성소수자, 그거냐?” 아빠가 물었다. 마치 밥은 먹었냐고 묻듯이 가볍게. 아빠는 경상도에서 나고 자란 ‘베이비부머’ 세대의 60대 남성, 한나라당과 새누리당을 거쳐 국민의힘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정당을 지지하며 오랫동안 대형교회에 다니던 사람이다. 평소 ‘잘 지내고 있냐, 졸업 준비는 어떻게 되어 가냐, 미래 계획은 무엇이냐’는 질문을 주로 하던 아빠는 비슷한 뉘앙스로 내가 성소수자인지 물었다. 그때 아빠의 질문과 나의 대답 사이에 흐른 찰나의 순간이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을 기억이 될 거라는 걸, 나는 직감했다.재작년
코로나19 시대가 길어지고 있습니다. 8월 15일을 계기로 제2차 감염 확산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등교가 결정되었지만, 여전히 조마조마합니다. 코로나19가 길어진 사이에 맞벌이 가정은 걱정이 더욱 많아졌습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성장의 공동체를 잃었습니다. 경제적 어려움과 학대로부터 학교가 유일한 피난처이던 아이들은 그 피난처를 잃어버렸습니다.우리는 코로나19 상황에서 역설적이게도 학교의 진정한 의의를 깨닫습니다. 맞벌이 가정이 늘어나고 사회적으로 불평등이 깊어지면, 학교도 돌봄, 급식, 교육복지 등 그 기능이 다양하게
인류 역사와 문명의 지속에 따라, 인간의 특성 때문에 인류 사회가 정보를 축적하여왔고, 기록에 의해 정보 축적은 가속화되어 왔다. 그에 따라 과학 기술의 발달로 인간은 에너지의 사용을 증진하여, 현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물산의 풍부 속에서 정신문명과 물질문명을 향유하고 있다. 그러나 과도하고 무분별한 에너지의 사용으로 기후의 위기 속에서, 코로나 사태가 야기되었고, 정신문명과 물질문명의 불균형과 에너지 사용의 불균형으로, 인류 사회가 많은 부분에서 상당한 위기에 봉착하였다. 일부 생명과학자들은 인류 종의 멸종과 인류 문명의 대단절
지역의 낡고 오래된 학교들은 폐교되어 사라져가고 있다.‘공산당이 싫어요.’아무도 찾지 않는 운동장을 향해 이 어린이는 아직도 외치고 있는 듯하다.눈에 보이는 것들은 사라져가지만, 정작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은 여전히 살아남아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다.
지난 추석을 맞아 평소에도 이미 만연하던 가족주의 이데올로기가 더욱 활개를 쳤다. 명절을 늘 따라다니던 가족갈등과 스트레스는 위선적 포장의 내부를 들추는 역할을 해왔는데, 전염병 상황은 이마저도 ‘합법적으로’ 피해 갈 수 있는 명분을 주었다. 가족에 최우선의 가치를 부여하는 오랜 전통과 체화된 문화는 지적, 정치적 입장과 관계없이 가장 효과적으로 작동하는 제1원칙이다. 가족이라는 성역 앞에서는 모두가 비슷한 꼴이 된다.사회적 성공을 향한 기나긴 행렬의 구성원들은 각기 다른 몫을 차지하지만, 부와 권력을 얻으려는 근본적 이유이자 목적
아! 슬프도다.어찌 이리도 매정한 현실이 반복되는가? 정부는 노동 현장에서 직업적 단련으로 형성된 기능을 평가받는 자리가 기능대회라고 설명한다. 아니다. 현실과 멀어진 대회는 산업체에서 외면받았고, 지금은 학생 중심으로 유지되고 있다.기능대회 개선안을 낸 교육부는 2007년 고 황준혁, 2020년 고 이준서 학생의 죽음으로 보여준 아픈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 메달 경쟁 때문에 희생된 학생들의 모습은 13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죽음의 사슬을 끝내지 못하고 오늘 또 연장하고 있다. 우리는 ‘교육부가 왜 존재하는가?’ 묻지
수도권과 지방이 고속철도망으로 연결되면 과연 균형적인 발전이 가능해질까.대구경북 통합신공항이 의성-군위로 들어서게 되면 과연 지역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을까.우리를 연결 짓는 일들이 곧 우리를 갈라놓는 일이 되고 있지는 않은가. 그동안 우리가 만들어 놓은 세계가 서로를 가까이 이어주었다고 생각했지만, 코로나19 시대에 들어서면서 문명이 파헤쳐 놓은 대지가 인류를 위협하고 있음을 직시하고 있다.기후위기의 시대, 언택트 시대의 연결망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 없이 우리는 또다시 지구를 불구덩이 속으로 밀어 넣고 있는 듯하다.2023
2020년 4월 8일은 고 이준석 학생의 부모님에게는 평생 기억하고 싶지 않은 날, 죽임을 당한 자식을 가슴에 담고 살아야 하는 날이 되고 말았다. 다 큰 자식을 먼저 보낸 학부모의 마음을 어떻게 누가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것도 전인교육과 민주적 시민의식을 기르는 교육의 장소인 학교에서 일어난 반교육적인 일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지난 6월 23일(화) 국회 소통관에서 있었던 신라공고 고 이준서 학생 사망 사건 진상조사단의 중간보고 기자회견에 따르면 ‘얼차려를 1시간 동안 받거나, 쇠파이프로 맞은 학생, 팔과 젖꼭지를 꼬집
9월 3일 대법원은 ‘전교조에 대한 법외노조 조치가 위법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법외노조 통보의 근거가 된 노조법 시행령 9조 2항이 헌법상 ‘법률유보의 원칙’에 반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법률에서 위임하지 않은 시행령에 따라 행해진 법외노조 통보는 무효이다.’라며 고등법원으로 이 사건을 파기 환송하였다.이로써 7년간 끌어오던 전교조 법외노조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전교조의 주장과 투쟁이 옳았음을, 나아가 노동조합의 자주성을 확인한 것이다. 대법원 판결로 전교조는 법외노조라는 멍에를 벗게 되었고 해고자들은 그리운 학교로 돌아가 학
해질녘, 출장 길에 나서면서 어깨엔 짐 가방을 메고 한 손엔 작업화를 들고 택시를 탔다. 기사님이 또래 혹은 조금 더 연배가 있어 보였는데 다짜고짜 일 끝나고 돌아가는거냐 한다. 아마 건설 현장의 노동자로 본 모양이다.일이 끝난 것이 아니라 일을 하러 간다니 놀란 눈치다
2015년, 당시 고등학생이던 김다운 씨가 학교를 자퇴하고 지역의 여러 학교 앞에서 들었던 대자보의 제목은 이러했다. “나는 꼭두각시가 아니다. 그렇기에 실을 끊겠다.”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실의 묵직함이 불현듯 감지될 때가 있다. 정해진 곳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자발적 움직임이 아니라 실들에 이끌려 어딘가로 처박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꼭두각시의 그림자와 함께 불쑥 엄습한다. 실을 끊은 꼭두각시는 무엇이 되었을까, 꼭두각시가 아닌 그 무엇이 될 수 있었을까.같은 해, 의 저자인 김민섭 작가는 “나는 오늘 대학
마당에는 말끔히 차려입은 세 사람이 서 있다. 가운데 어머니로 보이는 여성이 학사모와 졸업가운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들의 졸업식 날을 기념하여 남긴 사진인 듯하다. 흰 고양이도 이들의 가족이었을까? 그도 이 기념일에 빠지고 싶지 않아 아들의 옆자리에 서성인다.어디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흔한 풍경을 담은 이 사진은 그러나, 불행하게도 아니, 다행스러운 것일 수도 있지만, 폐허가 된 마당에서 발견되었다. 집은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이 무너져 내렸고, 사진 속 주인공들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후손인지도 모를 고양이들만이 집터 주변
‘2020 연극 전태일’이 코로나19의 삼엄한 수비를 뚫고 결국 대장정에 나섰다. 매일 터져 나오던 수도권의 산발적 감염 소식 속에서 6월 구로 초연을 치러내고 7월 4일 경산시민회관 공연을 막 마쳤다. 이제 안동으로 향한다. 이 장기 불황에 관의 지원 없이 자발적 우정과 연대로 밥을 모아 전태일처럼 뚜벅뚜벅 걷는다.사막 같은 일상에 생기를 불어넣고 싶다고 제작진은 말한다. 이 공연에는 젊은 예술 노동자들의 땀냄새가 짙게 배어 있다. 16명의 배우는 두 달 동안 ‘연극 전태일’의 장면들을 만들어왔고 무대마다 온 힘을 다하고 있다.
영국의 인류학자이자 연극이론가인 빅터 터너(Victor Turner)는 어느 인간 사회에서나 엿볼 수 있는 만인이 체험하는 사실로서 사회과정을 사회극으로 보고 이론화하였다. 그는 삶을 기승전결이 있는 하나의 드라마로 해석한 것이다.모든 인간의 삶이 그러하겠지만, 성주 소성리의 현재는 영화와도 같다. 지난 5월 29일 새벽, 그리고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6월 22일 새벽에도 국방부와 경찰 병력은 마을에서 군사작전을 펼치며 사드 레이더 부속 장비를 반출입했다. 마을을 드나드는 길은 가로막히고 집집마다 경찰들이 대문을 막아서며 주민들을
스마트폰 화면을 스치는 손끝의 섬찟함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눈이 ‘콘텐츠’를 바삐 좇는 동안 손가락은 부지불식간에 삭제되어 버린 모양이다. 불쑥 다시 제 존재를 알리기 시작한 손가락은 이런 것을 만지기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라고 항변하듯 때때로 이물감을 전달한다. 손가락들은 코로나19로 촉발된 ‘언택트’ 시대가 찬양하고 갈구하는 디지털에 대해 생각한다. 한 러시아 언론은 가구 인터넷 접속률이 99.5%에 이르는 한국을 코로나19 이후에 살아남을 유일한 나라로 꼽았다고 한다. 손가락(digit)을 잃어버린 백 퍼센트
그는 일흔을 넘긴 할머니였다.이른 봄날 산에 나물을 찾아 나선 것일까. 봄나물을 캐다 말고 춤을 추고 있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마을 사람들에게 늑대가 나타났다고 외치는 중일까.사진은 아무 말이 없다. 그 안에는 꽃도 피어 있고, 숲도 우거져 있으나, 이곳이 어딘지 또 언제인지 저 할머니는 도대체 무얼 하고 있는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하물며 사진의 바깥을 알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늘 사진을 보고, 보여준다. 사진을 붙잡고 말을 하고 있다.사진 속 할머니는 이제 팔순의 나이에 이르렀다. 그는 파킨슨병으로
2017년 봄, 차가운 바다 아래 갇혀있던 세월호가 뭍으로 올라왔다. 목포신항에 누워있는 거대한 고래 같던 그것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돌아오는 길에는 동백을 한참 바라보던 고양이를 만났다. 바라본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기억이란 새로운 시간을 열려는 노력이라고 하는데,인간의 기억이란 얼마나 가벼운지. 사진은 또 얼마나 나약한 것인지.
“증인, 선서하세요.”“선서. 양심에 따라 숨기거나 보태지 아니하고 사실 그대로 말하며, 만일 거짓말을 하면 위증의 벌을 받기로 맹세합니다.” 작년 여름, 포항 법원 제1호 법정. 나는 형사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내 왼편에는 검사가, 오른편 피고인석에는 한동대 학생처장이 앉아 있었다. 죄명은 명예훼손. 학생처장이 나의 실명과 함께 나에 대한 모욕적인 발언이 담긴 문자를 교회에 퍼뜨렸기 때문이다. 새삼 피고인석에 “국민”으로서 앉아 있는 학생처장의 모습이 묘하게 다가왔다. 2년 전, “국민으로서 얘기하려면 학교 밖에서 해!”라고
“재난은 밑에서부터 차오른다.”한때 즐겨 듣던 팟캐스트에서 재난 관련 이야기를 하던 출연자가 했던 말이다. 재난은 대체로 그 사회 내에서 힘없는 계층이 가장 먼저 그리고 더 큰 고통을 경험한다. 1348년, 흑사병의 공포 역시 종교적 광기와 함께 혐오와 배제로 나타났다. 이는 유대인과 같은 이민자나 빈민들처럼 사회적 소수자나 약자들을 향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이런 혐오를 조장하고 이용했다. 유대인 혐오, 인종적 차원과 경제적 차원탈무드에서는 신을 만나는 행위는 신성한 것이기에 평소에 자주 손을 씻는 등 청결한 생활 습관을 강조한
‘일상생활의 끔찍함’을 새삼스레 확인하는 요즘이다. 전염병이 가져다준 새로운 일상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그리워 마지않는 바로 그 일상 말이다. 쏟아지는 위기와 재난의 이야기들을 헤치고 살금살금 길을 나선 눈동자는 이내 어리둥절해진다. 너무 많은 것이 바뀌고 너무 많은 것을 빼앗겨서가 아니라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어서. 도로와 자동차, 건물들은 굳건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꿈쩍도 하지 않고 영영 고정되어 버린 것 같은 고체적 풍경에 숨이 막힌다. 물론 견고한 파이프 속을 부지런히 흘러 다니던 부동액의 유속이 오프라인 세계에 한해 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