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경찰병력이 소성리로 들어오는 이유는 하나다. 미군이 육로로 통행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기 위해서 국방부와 경찰이 자국민을 상대로 합동작전을 펼치는 것이다. 이 간명한 사실을 사람들은 잘 이해하기 어렵다.국방부의 대외협력단 정 소령은 소성리 할머니들께 ‘국방부는 공사 인부들에게 마을길로 다니지 말라’고 이야기하지만, 공사 인부들이 불만을 제기하고 항의하기 때문에 말릴 수가 없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할머니들이 만난 공사 인부들의 말은 달랐다. 그들은 예전부터 소성리 마을길을 이용하지 않고 미군 숙소로 연결된
경찰과 국방부가 협력한 미군 육로수송 작전은 멈추지 않는다. 지난 7월 8일 경찰청 인권위원들이 소성리로 방문했을 때, 나는 경찰폭력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서 4개의 영상을 준비해 참가했다. 당장 현실에서 닥친 일들, 사드기지 건설에 동원된 공사 차량과 장비들, 미군에게 제공되는 물품 차량들이 마을길로 통행하지 못하도록 주민들과 연대자들이 소성리 마을길에서 집회를 하고 연좌 농성을 할 때면 어김없이 경찰병력이 저지르는 성추행, 폭력적인 강제진압을 중단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생각했었다.인권위원이 소성리 이장님께 주민들의 고충이 무엇이
6월과 7월의 소성리는 마늘과 양파, 감자를 수확하느라 정신없이 바쁜 농사철이었다. 화요일과 목요일은 경찰병력이 들어오는 바람에 마을길을 지키느라 일할 시간을 빼앗겼다. 틈틈이 밭에 나가서 수확하고 빈 땅은 또 깨 모종을 옮겨심느라고 이 집, 저 집 품앗이가 한창이었다. 팔순이 넘은 할머니들의 일손이 웬만한 장정보다 더 필요한 철이었다.도금연 할머니가 몸살이 났나 보다. 온몸이 아프다며 생전 빼먹은 적이 없는 소성리 야간시위를 나오지 않으셨다. 소성리 부녀회장님도 몸이 아프면 나올 생각하지 말고 무조건 푹 쉬시라고 말씀을 드렸지만
7월 8일은 미군 육로수송 20번째 군경합동작전이 있는 날이었다. 마을길에서 경찰들에게 끌려나와서 주저앉아 펑펑 울었다. 주변 사람들은 애처롭게 나를 쳐다보겠지만, 한 번씩 펑펑 울고 나면 속이 시원했다.경찰청인권위원회가 소성리로 찾아왔다. 마을길로 들어설 때부터 성주경찰서장의 관용차로 의전을 받아 들어왔다. 경찰 방송하는 경비작전 계장의 목소리는 한층 더 낮고 부드러워졌다. 간곡히 시위대가 스스로 갓길로 이동하길 바란다고 했지만, 우리는 웃음만 났다. 그리고 경찰들의 행동도 느려졌다. 예의를 갖춰서 집회참가자들에게 마을회관 쪽으로
일주일에 두 번씩 새벽마다 소성리 마을길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경찰폭력에 부상자들이 늘어나고 있었다.소성리 부녀회장님은 반찬이라도 연대를 받고 싶다는 말씀을 하셨다. 2016년 9월 30일 소성리로 사드 배치가 결정 나고 그해 가을부터 겨울 그리고 해를 넘기고도 끊임없이 소성리로 연대자들이 들어왔고, 소성리 부녀회장님은 밥을 지었다.처음엔 마을 주민들이 먹을 밥을 했지만, 마을에 모여드는 연대자를 외면할 수 없어서 식사시간이면 마을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회관으로 들어와서 반찬이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밥이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한솥
6월 17일 목요일은 경찰병력이 소성리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사드 기지 건설공사에 투입되는 공사 인부들이 들어오지 않는 건 아니다. 우리는 경찰과 싸우려고 소성리로 오는 게 아니다. 사드-미군 기지가 건설되는 것을 막고 소성리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싸운다. 경찰이 어마어마한 병력으로 우리의 앞길을 막고, 사드 기지 건설을 돕고 있으니까 부득이 경찰과 마찰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경찰병력이 하루 쉰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나는 소성리로 아침 일찍 올라갔다. 공사 인부들이 사드 기지로 들어가려는 것을 막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
미군의 육로수송을 열어주기 위해서 경찰병력이 소성리로 들어오는 5월 14일부터 해결해야 할 일이 하나 있었다. 새벽부터 소성리로 달려와 한판 싸우고 나면 사람들은 출근하기도 하고, 참외 하우스, 딸기 하우스, 과수원, 논밭으로 농사지으러 가야 했다. 새벽부터 열을 내고 땀이 나도록 경찰과 한판 전쟁을 치른 사람들에게 아침밥을 먹여야 했다.첫날은 사드배치반대김천시민대책위에서 빵과 음료 그리고 김밥 등의 요깃거리를 바리바리 싸 들고 와서 나눠 먹었다. 하루만 전쟁을 치르고 끝날 줄 알았지만, 화요일과 목요일 일주일에 두 차례 정기적으로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정기적이고 지속해서 경찰병력이 소성리로 들어오면서 국가폭력을 당해 분노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새벽까지 잠 못 드는 밤이 길어지고,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와서 화끈거린다. 6월 10일은 소성리로 12번째 경찰 침탈이 있었다. 경찰버스 50여 대가 소성리로 들어왔다. 1000여 명의 경찰병력이 타고 있는 버스다. 늘 하던 대로 하면 6시 50분에 작전이 시작되어야 하는데, 작전은 조금 시간을 끄는 듯한 모습이었다.집회를 시작하자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사복 입은 경찰이 집회 장소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도로 한가
6월 3일은 10번째 경찰 침탈이 있는 날이었다.나는 지난주부터 경찰들에게 끌려 나올 때, 발가락에 쥐가 났다. 끌려 나오기도 전에 여경들이 둘러쌀 때부터 몸이 경직되고, 뻣뻣해져서 잡아끌지 말라고 말해도 경찰들에게 내 말이 닿지 않는 듯했다. 여자 경찰은 “가실께요”하면서 막무가내로 사람들을 끌고 나갔다.그날도 경찰들이 난입해 들어오니까 옆 사람에게 밀착한다고 몸을 움직이는데 종아리가 경직되고 발에 쥐가 난다고 끌어내지 말라고 했는데도 경찰들은 막 끌고 나가려고 해서 소성리 구판장을 운영하는 이옥남 어머니를 붙잡았다. 옥남 어머니
5월 14일 이후 1000여 명의 경찰병력이 일주일에 두 번, 화요일과 목요일 소성리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새벽 6시까지 소성리로 달려갔고, 사드기지 건설 반대 집회를 하면서 경찰들의 폭력에 온몸이 피멍으로 물들었다. 소성리 주민들은 몸과 마음에 골병이 들어간다.5월 18일 화요일부터 본격적인 미군 육로수송 군경 합동작전이 시작되었다. 2021년 소성리로 5번째 경찰 침탈이 있는 날이다. 개신교 진보단체 ‘예수살기’에서 소성리로 파견 나온 강형구 장로님의 거처(컨테이너)와 소성리책방 컨테이너 사이에서 평화지킴이들이 격자를 들
나는 성주 주민이다. 10여 년 전에 도시의 아파트 생활을 정리하고 대구 인근의 시골 마을인 성주로 이주해왔다. 대구에서 전투기 폭음으로 사람 살 곳이 못 되는 K2 군 공항 바로 옆 동네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결혼하고 아이도 낳았다. 가난한 살림에 K2 군 공항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아이가 크는 동안 전투기 폭음에 노출된 환경에서 아이를 키우는 게 너무 고통스러워서 조용하고 쾌적한 환경을 찾아서 떠나고 싶었다. 대구에서 가장 가까운 성주로 이주를 결정했었다. 대구에서 가깝다고 했지만, 대구는 우리 식구가 살던 아파트를 팔
쉬운 해고“강성운 씨, 당신 장애인이지?”“네 맞습니다.”“장애인은 나가!”포항의 시내버스를 운행하는 ㈜코리아와이드포항(이하 ‘버스회사’)의 총무부장과 노무차장이 갓 입사해서 버스 배차를 받은 강성운 씨를 불러놓고 대뜸 한 말이다.갑작스러운 해고 통보를 받은 강성운 씨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직장 상사한테 화내면 안 되잖아요. 막말하면 안 되잖아요. 그런데 저더러 장애인이라며 나가라는데 저도 화가 나잖아요. 뭐 이런 일이 다 있나 싶더라구요. 해고도 절차가 있는데, 사람 뽑을 때는 애타게 만들어놓고. 이제 겨우 노선 파악을 다 했
매주 월요일, 사드부지 공사 강행을 규탄하기 위해 미군 숙소로 간다. 오후 1시 30분 소성리 마을회관에서 출발한다. 사드 철거를 요구하는 소성리의 투쟁이다. 우리는 평화행동이라고 부른다. 미군 숙소로 오르는 산길은 낙엽이 쌓여 푹신한 오솔길이다. 산은 물을 가득 머금고 있다. 계곡은 쉴 새 없이 물이 흐른다. 가파른 비탈길을 두 번 정도 오르면 큼직한 무덤 하나 나온다. 제법 깊은 산속에도 무덤은 잘 관리되어 있었다.무덤 위쪽 언덕에 올라서면 숨이 가빠 심장은 요란스럽게 뛰어댄다. 잠깐 호흡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요동치는
성주군 소성리는 원불교의 2대 종법사이며 세계 평화와 상생 공영의 ‘삼동윤리(三同倫理)를 통해 평화 사상을 널리 세상에 전파한 정산 송규 정사의 탄생지이자 성장지이다. 사드가 배치된 진밭은 정산 종사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구도했던 구도길이었다. 국정 농단으로 박근혜 대통령이 사상 초유의 탄핵 인용을 텔레비전으로 지켜보던 날, 소성리 주민들은 팔을 반만 올려 만세를 불렀다. 원불교 종교인들은 정산 종사의 족적을 따라 걸었던 구도길이 경찰에 가로막혀서 진밭교를 건너지 못하고 길바닥에 주저앉아야 했다. “주민들의 통행길을 열라”“스승님의
날마다 소성리 야간시위소성리 난롯가에 둘러앉아서 이바구를 나눌 때였다. 문득 생각난 듯이 소성리 부녀회장 순분 씨가 말했다.“할매들 우리 말 나온 김에 내일 올갱이 국밥 먹으러 갈까? 예전에 서울 집회 올라갈 때 황간에서 올갱이국밥 먹었잖아. 그때 그 집 또 갑시다.”소성리 할매들은 가자고 하면 어디든지 간다고 맞장구를 쳤다. 소성리 난롯가는 그렇게 의논하고 결정하고 약속을 정하고 실행을 하다 부딪히면 점검하는 베이스캠프 같은 곳이었다.다음 날 10시 30분 소성리 마을회관으로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우리에겐 황간까지 우리를
봄의 기운을 보낸 초 여름날, 풀이 자라는 속도를 낫이 따라가지 못했다. 아침마다 진밭의 아침기도회에 참석하고 불법으로 배치된 임시 사드기지 앞에서 평화행동을 했다. 마치고 나면 아침밥 먹을 새도 없이 고추밭으로 향했다. 달마산으로 오르는 길에 넓은 계단식으로 만들어진 논과 밭이 나란히 줄지어 있다. 나의 고추밭도 그 어디쯤 위치하고 있다. 초 여름날, 밭에서 김을 매고, 고추 모종의 가지를 친다. 밭고랑의 풀은 순식간에 자랐고, 비닐 구멍을 뚫고 올라오는 풀도 고추 모종 키만큼 자라고 있었다. 아침 8시 30분이 넘어 밭일은 시작
소성리 할매들의 노래패 ‘민들레합창단’은 꽤 긴 방학을 끝내고 다시 노래연습을 시작했다. 매주 모이던 요일도, 젊은것들 편의를 봐주신다고 월요일로 변경했다.지금까지 기타 반주를 맡았던 ‘정 가수’는 기꺼이 소성리 할매들을 위해서 시간을 내었고, 노래 선생님이 되어주셨다. 더듬거리는 순박한 말투에 해맑은 웃음을 자아내는 노래 선생님은 핵심을 콕 찔러서 딱딱 가르쳐준다. 소성리 할매들은 나이 어린 선생님이 아들 같고, 손자 같아서 편하게 말하기도 하지만, 난롯가에 모여 앉을 때면 ‘진석이가 가르쳐주니까, 노래가 잘 불린다’고 소곤소곤
※ 11월 5일부터 11월 8일까지 톨게이트 노동자 투쟁 승리와 노동 개악 저지를 위해 투쟁 현장을 방문하고, 간담회와 선전전 등의 연대 투쟁을 전개했습니다. 톨게이트직접고용시민대책위와 ‘비정규직 이제 그만’ 공동투쟁 3박 4일의 기록을 2회에 걸쳐 게재합니다. 톨게이트 노동자는 기운이 세다 투쟁사업장 순회투쟁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한나절 고민했다. 내가 따라나서도 되는 자리인지 알 수 없었고, 낯선 사람들과 낯선 공간으로 긴 시간을 떠난다는 것도 내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투쟁사업장을 찾아다닐 좋은 기회인 것만은 확실하다.
※ 11월 5일부터 11월 8일까지 톨게이트 노동자 투쟁 승리와 노동 개악 저지를 위해 투쟁 현장을 방문하고, 간담회와 선전전 등의 연대 투쟁을 전개했습니다. 톨게이트직접고용시민대책위와 ‘비정규직 이제 그만’ 공동투쟁 3박 4일의 기록을 2회에 걸쳐 게재합니다.(1편에서 이어집니다) 자본은 망하지 않는 손쉬운 폐업톨게이트 노동자들이 9월 9일 공사로 들어갔을 때 다섯 개 노조가 공동투쟁을 하고 있었다. 민주노총 일반연맹 소속의 민주연합노조와 공공연대노조 그리고 경남일반노조와 인천일반노조의 조합원들이 있었고, 한국노총 톨게이트노조 소
“연차를 공휴일로 다 대체하고, 점심도 이제 못 준다기에 억울해서 노조를 만든다 했어요. 그랬더니 갑자기 폐업을 해버렸어요. 일거리가 엄청 많았는데도요.”“공장부지 땅값이 엄청나게 올랐어요. 회사가 잘 되는데도 공장 돌리는 것보다 땅 파는 게 더 돈이 되니까요. 결국, 사장은 제조업 안 한다고 문 닫아 버렸죠““쪼그만 회사에서 경리사무했어요. 밑에 현장 직원들은 그대론데 왜 그런진 몰라도 사장이 맨날 부도 처리를 내고, 다른 사장 이름으로 다시 차리고, 똑같은 회사를 또다시 차리고, 또 부도내고… 일 처리 내가 다 하는데 언제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