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역사 이야기] 면장 휘장 속 오동꽃의 비밀
[근현대 역사 이야기] 면장 휘장 속 오동꽃의 비밀
  • 강철민
  • 승인 2019.06.28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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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카 소율이에게

 

오월 날씨가 35도라니 말도 안되게 더운 한낮이야. 올해는 특히나 고온에 이상기온이라 편지 쓰는 삼촌 이마에 땀이 줄줄 흘러. 안 그래도 뜨거운 햇빛에 눈이 저절로 감기는데, 왼쪽 눈꺼풀이며 눈두덩이에 쌍으로 다래끼가 나서 미칠 지경이다. 또 이놈의 파리는 왜 이리 많은지 양 볼에 날아들어 심기가 불편하다. 짜증에 짜증이 겹치는 오후구나. 

이런 날씨에는 계곡 웅덩이에 풍덩 뛰어들고 싶다. 삼촌이 어릴 적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는 길은 버스에서 내려 4km 정도의 거리였어. 십 리 길이라고도 하지. 초등학생 걸음이 얼마나 느렸겠니. 산골짜기인 집까지 가다가 이 마을에서 놀고, 저 마을에서 놀고, 이 웅덩이에서 놀고 저 웅덩이에서 놀고, 그러다 보면 해가 다 져서 집에 도착했지. 장난감도 제대로 없으니 돌멩이 하나가 자동차도 됐다가, 비행기도 됐다가 했어. 

특히 개구리를 얼마나 가지고 놀았는지. 무당개구리라고 하는 피부에 독이 있는 요놈을 그냥 가만두지 않았어. 손바닥으로 덮쳐서 잡았는데 요게 알록달록한 것이 꼭 화투장처럼 화려했거든. 햇살에 달아오른 매끈한 바위에 쫙 뻗은 개구리들을 왜 그리 말렸는지. 참 못 말리는 개구쟁이들이었다.

더운 날씨에 소율이도 공부하느라 힘들지? 그래도 열심히 일하시는 부모님 생각하며 학교생활 하도록 하자. 이번 학기에 소율이가 반에 반장을 맡았다고 이야기 들었는데 많이 힘들지는 않아? 

예전에 삼촌이 학교 다닐 때는 반장이 선생님 대신 반 아이들을 ‘관리’하고, 떠드는 아이들 이름 적어내기도 하고, 청소도 시키고 그랬는데 요즘도 그런가 궁금하기도 해. 국민학교에서 초등학교로 이름도 바뀌었는데, 이제 그런 일들은 별로 없겠지?

학교에서 반장처럼, 면 지역 행정을 맡아보는 사람의 직위 중에 ‘면장’이라는 것이 있어. 반장하고는 많은 부분에서 그 역할이 다르지만 비슷한 부분도 있단다. 오늘은 일본강점기 면장과 면장 휘장, 행정 소품들에 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일본강점기 때 면장은 그 권한이 막강했으면서도 원망의 대상이었어. 그도 그럴 것이 일 년 내내 씨뿌리고 뼈 빠지게 거두어 농사를 지어도 양식이 부족한 판인데, 공출제라는 것을 통해 각종 생산물의 6할 이상을 걷어가 한 가정의 생사여탈권을 좌지우지했으니 그 권한이 얼마나 컸겠니. 그리고 공출의 정해진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면사무소의 면서기와 경찰관주재소의 순사들이 공출독려원 이라는 이름으로 각 가정에 들이닥쳐 헛간이고, 장독대고, 처마 밑이고, 마루 밑에 곡식을 숨겨놓지 않았나 뒤졌으니 그 원망이 얼마나 컸겠니. 

아래 사진은 면장이 썼던 휘장과 행정 소품들이야. 

▲ 일제강점기의 면장 휘장 <br>
▲ 일제강점기의 면장 휘장 

면장 휘장은 조선총독부를 상징하는, 아래로 세 갈래 뻗은 오동잎 모양에 위쪽으로는 오동꽃 세 송이가 나란히 솟은 형상인데 가운데 꽃잎은 7장, 양옆의 꽃들은 각각 5장씩 달린 금속제 판에 표면은 칠보로 되어있어. 이러한 문양을 보고 '고시치노 기리’(오칠동 五七桐) 즉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문의 문양이라고도 이야기해.

휘장의 크기는 높이가 3.6cm이며, 표면에 황색의 바탕에 백색으로 '면장' 2자를 각 예서체로 씌어있어. 보통 양복에는 상의 왼쪽 가슴에 부착하였고, 한복에는 상의 오른쪽 매듭의 눈에 부착했단다. 1915년 8월 16일부터 시행되었는데 국권침탈 후 5년이 되는 시점이야. 설명이 복잡하니 사진을 참조해봐.

그리고 행정 소품들로는 다양한 도장들과 곡식 검사용 색대가 있는데, 색대는 약 10cm 정도로 된 빨간색을 칠한 나무 손잡이에 빨대 끝처럼 속이 빈 금속대롱을 비스듬히 잘라 날을 세워놨어. 이 색대를 곡식 자루에 푹 꽂아 빼면 곡식이 색대에 담겨 나와 검사를 할 수 있었지. 각종 도장에는 보령군 웅천면이라고 적혀있는데 이를 통해 이 면장 휘장과 도장, 색대의 사용자가 웅천면의 면장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어. 어쩌면 웅천면의 공출 곡식의 검사를 이 색대로 하지 않았을까?

 

▲ 각종 행정 소품, 도장

일본강점기에는 소율이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같은 분들이 농사를 지으면 공출제도로 6할 이상이 일제가 일으킨 전쟁의 물자로 쓰였어. 공출의 종류도 쌀, 보리, 고사리, 면화 등 40여 가지나 되었으며 심지어 박물관의 문화재를 녹여 전쟁물자를 만들기도 했어.

소율이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하는데. 일제 말기 군 위안부 모집과 징용, 징병 등 강제동원을 비롯해 공출 등 각종 물자 수탈의 첨병으로 활동했던 말단 행정책임자인 면장들의 사진이 전국 면사무소 곳곳에 아직 걸려있다는 뉴스를 접하면서 씁쓸한 마음이 드는구나.

그래도 소율아 희망을 품고 열심히 살아가자!
열심히 공부하고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
또 편지 쓸게.

안녕.

 


글 _ 강철민 대구경북근현대연구소장

 


“공출”이란

민족항일기 공출제도는 1939년 대흉작으로 식량 사정이 악화한 가운데 전시 군량을 확보하기 위하여 1940년부터 강제적으로 시행되었다.

일제는 1939년<미곡배급조합통제법>을 제정하여 미곡의 시장 유통을 금지하고 농민의 자가 소비분 대부분까지도 헐값으로 강제 공출시켰으며, 그 대신 만주 등지에서 들여오는 콩이나 피 등의 동물용 사료를 배급하였다.

그 뒤 미곡 공출실적이 저조하자 1943년<식량관리법>을 제정하여 맥류·면화·마류(麻類)·고사리 등에 이르기까지 40여 종에 대하여 공출제도를 확대하고, 강제 공출을 이행시키기 위하여 무력까지 사용하는 등, 전시 군량 확보를 위하여 온갖 강압적 수단을 다 동원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발췌,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