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율이에게


봄비가 내린다.

봄은 항상 설렘을 주었어. 봄이라는 단어 자체가 주는 희망, 기대도 있지만, 유년 시절 봄에 대한 다양한 기억이 몸에 배어 그런 것 같기도 해. 

사람이 없어 늘 심심했지만 놀 건 많았어. 

아직 겨울 찬 기운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지만, 따뜻한 햇볕이 개울물과 자갈돌에 비춰 반짝이던 이른 봄날로 기억돼. 아버지는 저 멀리 산자락 밑에서 밭일을 하고 계셨고, 어머니는 개울 옆에서 봄나물을 캐며 간혹 나에게 찔레순이며 삘기를 까 주셨지. 병아리처럼 엄마 주위를 왔다 갔다 하며 개울물에 돌 던지기를 하고 있었어.

“음매에” 

염소 울음 소리가 나서 돌아보니 건넛집 아저씨가 염소 한 마리를 끌고 오셨어. 나와 동갑내기 여자아이가 사는 그 집엔 젖소를 많이 키우고 있었는데, 염소도 더러 있었지.

그런데 그날 본 염소는 촌스럽게 생긴 시커먼 염소가 아닌, 티브이 외화에서나 보던 새하얀 얼굴을 가진 ‘세련된’ 염소였어.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서구우월주의에서 비롯된 인상이었고, 염소가 아니라 산양이었어) 하여튼 그 세련돼 보이는, 어쩌면 근엄하기까지 한 그 염소는 앞집과 건넛집 그리고 미국이 세계 최강으로 비치는 티브이가 세상 전부인 나에게 신세계였어.

건넛집 아저씨는 내 머리를 몇 번 쓰다듬고는, 맛 보여줄 ‘맛있는 것’이 있다며 고무장갑에 바람을 불어 넣은 것 같은 염소의 젖을 잡더니, 능숙하게 쏴쏴 젖을 짜기 시작했어. 그을릴 대로 그을려 속이 하얀 자그마한 양철 주전자에 금방 염소젖이 가득 찼어.

아저씬 모닥불을 지펴 그 위에 주전자를 걸어 올렸어. 고소한 냄새를 풍기며 염소젖이 끓기 시작하자, 하얀 설탕을 집어넣고 휘휘 저어 나에게 한 잔 주셨어. 뜨거워 바로 먹지 못하고 후후 불었더니 살얼음처럼 얇은 기름 막이 꼈어. 

나무줄기를 꺾어 대충 걷어 내고 한 모금 마셨는데 온몸의 신경이 춤을 추고, 미각은 열 배쯤 확장되는 것 같았어. 혓바닥이 녹아내릴듯 부드럽고, 고소하고, 달콤한 맛이었어. 그건 이제껏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이국의 맛이었어. 

기억력이라곤 손바닥의 털만큼 없는 내가, 햄 소시지를 먹고 아스팔트를 씹은 듯 역하고 속이 울렁거려 토해버렸던 강렬한 기억과 함께 이 이국적 맛이 아직 기억나는 건, 유년 시절 처음으로 세련된 맛을 경험해서가 아닐까?

 

       △ 전북 고창군 오산면 출역 통지서(1921). 대구경북근현대연구소 소장 자료.

오늘은 관공서 문서에 대해 살펴볼게. 1921년 제작된, 백 년이 다 돼가는 일제강점기 오산면 문서야. 면서기가 누구였는지 몰라도 너무 날려 써서 해석하기가 무척 힘들었던 문서로 기억돼. 

원문을 해제하고 내용을 읽어보자.

 

五山 第 二九三号
大正十年五月三十日
五山面長

各 区長 殿
人夫出役의 干한 件
本面 駐在所 新築 告함에 처하야 盖草 掘开 等도 亦是 完成치 아니하면 아니 될 뿐 아니라 

高敞 武長 间 三等 道路 暗橋도 修築하기로 貴?은 管內 扗丁人夫 拾名式 引率하고 六月二日(辰四月二十六日) 午前八時까지 午飯과 지게, 광이, 鉚삽, 티비, 곡광이 等 物을 携帶케 하야 出役하시기 為要

再 駐在所 盖艸飛乃 送付치 못한 区內는 此䧏 送付하시기為要

 

중간중간 한글도 나오는데, 흘려 써서 해석이 잘 안되는 것도 있지만, 백 년 전 문서이다 보니 철자나 해석이 지금과 다른 게 많아. 

아래에 직역한 것을 보도록 하자.

 

오산 제293호
대정 10년 5월 30일
오산면장
각 구장 앞

인부 출역에 관한 건

본면 주재소가 신축을 하게 되어 지붕 이엉, 땅파기 등도 역시 완성치 아니하면 아니 될 뿐 아니라, 고창 무장 간 3등 도로 암교도 수리하여야 하기에 귀하께서는 관내에 있는 성인 인부 10명을 인솔하여 6월 20일(음력 4월 26일) 오전 8시까지 점심과 지게, 괭이, 철삽, 빗자루, 곡괭이 등 물건을 휴대케 하여 출역하시기 바랍니다. 

거듭하여, 주재소 지붕 이엉을 송부치 못한 구내는 이를 중히 여겨 송부하시기 바랍니다.

 

이 문서는 1921년 5월 30일 전라북도 고창군 오산면(지금은 익산시 오산면)에 있는 주재소 신축과 고창-무장 간 3등 도로에 있는 암교(작은 굴다리) 수리를 위해 오산면 각 마을에서 성인 장정 10명씩 데리고 준비물을 챙겨 출역하라는 통지서야. 고창-무장간 *3등 도로는 지금으로 치면 전라북도지사가 관리하는 지방도 정도가 될 것 같아. 

당시에는 건물이나 도로, 다리, 저수지 등을 만들거나, 수리하는데 마을 출역이라는 것을 통해 노동력을 제공했어. 말 그대로 마을에서 무상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인데, 재밌는 것은 출역해서 사용할 공사 연장까지 모두 각자가 가지고 가야 했어. 심지어 동원된 그날 먹을 점심밥까지 챙겨 가야 했지. 

이 문서를 보면서 **식민지근대화론이 떠오르더구나. 일제강점기 식민지 시절을 거쳤기 때문에 조선이 경제적으로 발전하고 근대적 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친일청산을 제대로 못 해 잉태된 이론이지.

1910년 조선총독부령으로 만들어진 주재소, 이곳의 지붕 이엉도 각 마을에서 각출하고, 조선총독부 이하 식민지 도지사와 도청이 관리하는 3등 도로 암교의 수리도 각 마을에서 동원한 10명의 조선인 장정들이 했어. 심지어 그 공사에 필요한 지게, 괭이, 삽, 빗자루, 곡괭이까지 준비해 수리하고, 그날 먹을 점심밥까지 개인들이 준비해서 동원되는데, 그 무슨 식민지근대화론이 이해되어 동의하겠니. 

식민지근대화론을 주장하는 대학자(大學者)들이 하루만 저 출역에 동원돼 지게질에 곡괭이, 삽질을 해본다면 논쟁은 정리되지 않을까? 학문적 논쟁이 아니라,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의 사관(史觀)의 문제와 함께 어떻게 살 것인가의 인생관(人生觀)에 관한 문제가 아닐까? 


코로나19로 사망자가 늘고 개학도 늦어지고 있어. 

소율이도 건강 관리 잘하고, 힘을 합쳐 잘 극복하자! 

 

 

*1920년 조선총독부령 도로규칙에 따르면 도로를 1, 2, 3, 등외 도로 총 4등급으로 나누어 관리했다. 각각의 도로 관리 및 비용 분담은 1, 2등 도로는 조선 총독이, 3등 도로는 도지사가 하였고 등외 도로는 부윤이나 군수, 도사가 관리했다. (국토해양부, 2009, 도로 업무편람, p.14)

**식민지근대화론(植民地近代化論) : 일본 제국 쇼와 천황의 한국 식민 지배가 결과적으로 한국의 산업화와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이론. 고종의 무능과 명성황후를 비롯한 민씨 척족에 의해 피폐해진 조선을 일본이 합병함으로써 한국의 산업화와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내용이다. 이 이론은 일제강점기에 일본 학자들이 정체성론의 일환으로 주장한 바 있다. 한국에서는 1950~1960년대에 일소되었다. 그 뒤 일본 우익 정치인들만 간헐적으로 주장했으나, 1980년대 이후 뉴라이트 계열의 안병직, 이영훈에 의해 부활되었다. 일제의 한국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위키백과 발췌, 요약)


글 _ 강철민 대구경북근현대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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