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역사 이야기] 1923년생, 청년 양수일의 마음
[근현대 역사 이야기] 1923년생, 청년 양수일의 마음
  • 강철민
  • 승인 2020.02.03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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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율에게


올해도 벌써 한 달이 지났구나. 날씨까지 따뜻하니 농사짓는 농부의 마음이 더 바쁘다. 이대로 봄을 맞이하는 건 아닌지 걱정도 된다. 겨울이 추워야 병해충도 덜하고 농사가 잘 되는데, 설이 지난 지금까지 눈이라곤 한 톨 내리지 않고, 비가 내리다니. 농사도 농사인데 그것보다 첫눈을 보지 못한 아쉬움이 더 크다. 펑펑 쏟아지는 눈 속을 달리며 얼굴에 달라붙는 수박씨 같은 눈을 느끼고 싶다.

이번 설에 할아버지 집에 온 네 모습을 보니, 훌쩍 큰 것 같아 삼촌 기분이 좋더구나. 씩씩하게 동생들을 챙기는 모습이 기특하기도 하고. 세뱃돈을 넉넉히 주지 못해 미안하기도 하다.

삼촌도 설날이 참 좋았어. 어릴 적, 설날 아침 사촌들이 오면 산골의 온 집이 북적거렸어. 한겨울 심심했던 내 마음도 같이 북적거리기 시작했어. 정성 들여 준비한 음식으로 차례를 지내고 맛난 음식과 김이 펄펄 나는 하얀 떡국을 먹으면 그렇게 즐겁고, 행복할 수가 없었어. 

부모님과 어른들께 세배를 드렸어. 그러면 며칠 전부터 계획을 세워 쓰려고 기다렸던 세뱃돈을 주셨지. 손에 착 달라붙는, 신이 나서 흔들면 탈탈 소리가 나는 빳빳한 지폐를 주셨지. 그 첫눈 같은 세뱃돈을 차마 구겨 접지 못해 얼른 뛰어가 책 속에 끼워 넣었지. 천 원짜리 한 장도 참 소중했던 그때였어.

올해는 광복 75주년이 되는 해야. 광복 후 시간은 75년이 지났지만 달라진 건 별로 없는 것 같아. 친일 청산은커녕, 일본의 과거사 반성조차 없으니 분노가 치민다. 올해는 최소한 일제의 만행이 기억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에 대한 차별과 억압, 착취에 관한 자료를 중점적으로 소개해 보도록 할게.

 

조선 총독 아베 노부유키 명의 징용령서 앞면
△ 징용령서 앞면. 조선 총독 아베 노부유키 이름이 적혀 있다.

손바닥만 한 이 문서는 해방을 불과 두 달여 남긴 시점인, 1945년 6월 10일 조선의 마지막 총독인 *아베 노부유키 명의로 발급된 *징용령서(徵用令書)인데 말 그대로 강제동원인 징용을 명령하는 문서지. 

국민근로동원령 제25조에 따라, 1923년 생인(당시 23세) 전라북도 익산군 북일면 영등리의 양수일이라는 청년에게 경성부 용산구 한강통 3정목 40번지 조선총독부 교통국에서, 1945년 6월 10일부터 1947년 6월 9일까지 2년간, 국가총동원에 필요한 운수 관련 업무에 징용을 명령한다는 내용이야.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 명의 징용령서 뒷면
△ 징용령서 뒷면. 

뒷면에는 징용령서를 받은 자의 준수 사항을 알리는 문구가 있는데, 그대로 직역해 보도록 할게.

 

1. 수령서에 수령 연월일·성명 등을 기입하고 날인한 후 즉시 반부하여야 하며, 인장이 없는 때에는 무인하여야 한다.

2. 이 영서를 휴대하고 지정된 일시 및 장소에 출두하여 당해 관리 또는 사업장의 사업주에게 신고하여야 한다.

3. 상이·질병으로 인하여 지정된 일시 및 장소에 출두하기 곤란한 경우에는 의사의 진단서(부득이한 사정으로 인하여 의사의 진단서를 받을 수 없는 때에는 경찰 관리의 증명서)를 첨부하여 이 영서를 발한 도지사에게 지체 없이 신고하여야 한다. 

4. 천재 기타 피할 수 없는 사고로 인하여 지정된 일시 및 장소에 출두하기 곤란한 경우에는 그 지역의 부윤(경성부는 구장)·읍·면장 또는 경찰 관리, 선장 또는 역장의 증명서를 첨부하여 이 영서를 발한 도지사에게 지체 없이 신고하여야 한다.

5. 여비의 전금을 지불 받지 아니하면 출두할 수 없는 자는 거주지의 부윤·읍·면장에게 이 영서를 제출하고 일시 전환지변을 청구할 수 있다. 다만, 출두하여야 하는 장소가 거주지의 부·읍·면인 때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주의) 부·읍·면에서 여비의 일시 전환지변을 한 때에는 다음에 지변한 부·읍·면명, 지변 연월일 및 “여비 금○원○십전 지변완료”라 기재하고 증인하여 본인에게 반부하여야 한다. 

 

일제의 물적, 인적 강제 동원은 1937년 중일전쟁으로 본격화되었어. 1938년 국가총동원법 제정 이후 해방이 되기까지 35년간, 조선 인구의 20%인 약 700만 명이 탄광, 금속광산, 군수항만, 발전소, 철도, 도로, 군수공장, 군사기지, 군속, 종군위안부 등으로 강제 징용 당했어. 

또한, 해방 직전인 1945년 3월 6일, 일제는 미국 본토에 대한 침략전쟁을 앞두고 문과계 대학 및 고등 전문학교를 폐쇄하고, 환자 및 12세 이상 아동들을 동원의 대상으로 하는 ‘국민근로동원령’을 선포했어. 

조선 총독의 직인이 큼지막하게 찍힌 이 문서 또한 이러한 상황에서 발급된 징용령서이며, 조선총독부를 정점으로 각 지역 말단 행정들까지 조직적으로 강제 동원을 진행했다는, 부인할 수 없는 범죄 증거야.

이 징용령서가 발급된 일제의 침략전쟁 말기 식민지 조선에서는 물자, 인원들을 최대한 동원하기 위해 대대적인 징용 사업을 벌였지. 징용 배속 관아가 조선총독부 교통국이고, 업무 또한 운수업을 배정받았으니, 아마도 지역에서 상당한 유지의 자식일 거라 예상을 해봐. 본적지 또한 당시 대곡창지대이며, 전북지역 대지주 곡물 농장 중 60%가 있는 익산시, 그중에서 중심가인 영등동이라 하니 혹시 이 청년은 식민지 조선의 금수저 정도가 아니었을까?

그러나 김남주 시인의 ‘식민지 사회에서는 단 한 사람도 자유롭지 못하다’라는 말처럼 식민지 백성 중 누가 자유로울 수 있었겠니. 해방을 불과 두 달여 앞둔 시점이었지만 일제 당국도, 이 청년도 해방을 예상하지 못했겠지.

1945년에서 1947년까지 2년이란 긴 시간을 저당 잡힌 채 징용령서를 받아들고 출두 장소로 걸어가며 이 청년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 지긋지긋한 식민지가, 전쟁이 하루빨리 끝이나 사랑하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을까? 


청년 양수일의 마음을 상상해본다. 

 


* 징용 : 국가의 권력으로 국민을 강제적으로 일정한 노역에 종사시키는 것. 한국에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 정부에 의해 조선의 국민이 징용되었던 역사가 있다. 1939년 10월부터는 한국과 타이완 등에서 ‘국민징용령’을 실시해 본격적인 국민노동력 착취에 들어갔다. 이때 징용을 거절하는 자에게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원 이하의 벌금형을 내렸으며, 어린 학생들도 근로체제에 동원되어야 했다. 이러한 강제 징용 노동인구는 전체 조선인 인구의 20여 퍼센트에 달했다.

* 아베 노부유키 (1879 ~ 1953) 1944년 7월에 마지막 조선 총독으로 부임했다. 부임 후 전쟁 수행을 위한 물적·인적 자원 수탈에 총력을 기울였다. 징병·징용 및 근로보국대의 기피자 색출에 광분했으며, 심지어는 만 12세 이상 40세 미만의 여성에게 정신근무령서를 발부했고, 불응할 때는 국가총동원법에 따라 징역형을 내렸다. 1945년 7월에는 국민의용대 조선총사령부를 조직하여 조선인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1945년 9월 8일 미군이 남한에 진주하자, 9월 9일 이후 항복 문서에 조인하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다음백과 발췌·요약)

 


글 _ 강철민 대구경북근현대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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