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욕의 시대를 지나 초강대국으로 부활하는 중국

중국과 우리는 지난 수천 년 동안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다. 때로는 침략자로, 때로는 “중화”에 대한 ‘사대’의 대상으로 숭앙될 만큼 그 관계는 복합적이고 다면적이다. 한제국 VS 고조선, 수ㆍ당제국 VS 고구려(&신라), 요ㆍ금ㆍ원 유목제국 VS 고려, 청제국 VS 조선에 이르기까지 지난한 항쟁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전근대 역사에선 주로 ‘대국’으로 떠받들어주며 당대의 국제무역인 ‘조공체제’(당대 중국의 조공은 대부분 오히려 중국이 적자를 보는 구조였음)를 유지하며 실리를 취해온 게 우리의 주요 접근법이다. ‘중국’은 세계의 중심이라는 자부심이 깃든 이름이었고 수천 년간 중국은 능히 그 이름을 내세울 만했다.

 

영화 "황비홍-서역웅사" 포스터 이미지
▲ 영화 "황비홍-서역웅사" 포스터

그러나 아편전쟁 이후 100여 년간 중국은 서구 열강에게 식민지화되었고 심지어 같은 아시아 국가인 일본에게도 침략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수치를 겪었다.

많은 중국인이 해외로 이주했지만, 차별과 고난은 사라지지 않았다. 서구에서 유대인이 겪던 질시와 폭력에의 노출은 ‘화교’란 이름으로 경제권을 움켜쥔 동남아시아 곳곳에서 유사하게 재현되었다. 태평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간 중국인들은 해방된 흑인 노예 대신 대륙횡단철도 건설에 투입되었지만 ‘쿨리’라는 멸칭을 들어야 했다.

이연걸의 화려한 무술로 기억되는 <황비홍> 시리즈에도 ‘금산’을 찾아 떠나는 중국인들의 일화가 배경으로 깔린다. 성룡의 할리우드 진출작 <상하이 눈>의 주요배경 역시 이 당시 미국 서부가 주요 무대일 정도다. 그렇게 세계 곳곳의 “차이나타운”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 같은 시기 전후로 일본 역시 가난한 농민들을 브라질과 하와이 등으로 대거 이주시켰다. 거기에 묻어간 한국인들은 멕시코나 쿠바까지 흘러 들어가 ‘애니깽’이 되어야 했다. 만주와 연해주로 간 사람들은 ‘까레이스끼’가 되었음도 덧붙인다.

 

영화 "상하이 눈" 포스터 이미지
▲ 영화 "상하이 눈" 포스터

 

2.1 ‘단기 20세기’ 중국의 초상: 대륙

제국주의 열강의 세력권으로 조각난 중국 대륙은 쑨원의 신해혁명을 거치지만 여전히 외세를 등에 업은 군벌들이 할거했다. 후계자인 장제스의 북벌을 거쳐 재통합되었지만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을 거쳐야 했다. 결국, 1949년 마오쩌뚱의 공산당이 대륙을 석권해 중국 본토는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재통일되었다. 신생 ‘붉은 중국’은 직후 한국전쟁에 북한을 지원해 참전하며 미군과 일진일퇴해 과거와 다른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 결과 분단은 지속되었고, 중국 본토는 ‘죽의 장막’ 너머이자 북한의 후견인으로 우리 현대사에 기억되었다. 마오쩌뚱의 주도로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이 연속적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는 전통의 파괴와 구체제의 말살, ‘문혁세대’라는 기이하게 단절된 세대를 낳았다.

 

영화 "마지막 황제" 포스터 이미지
▲ 영화 "마지막 황제" 포스터

이러한 격동의 세월은 청제국 마지막 ‘천자’이자 일본의 괴뢰국 만주국의 황제로 기구한 인생을 살았던 애신각라 부의의 일생을 서구 오리엔탈리즘의 시선으로 담아낸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마지막 황제>와, 자매의 일대기가 곧 중국 전체의 역사로 이어지는 <송가황조> 등으로 그 편린이나마 따라갈 수 있다. <송가황조>는 송씨 가문 세 자매의 상상을 초월한 인생살이, 즉 1명은 쑨원의 부인, 1명은 장제스의 부인, 1명은 장제스 시기 중국 자본계를 대표하는 쿵샹시의 부인이 된 가족사를 다룬다.

 

영화 "송가황조" 포스터 이미지
▲ 영화 "송가황조" 포스터 
영화 "사령혼 : 죽은 넋" 포스터 이미지
▲ 영화 "사령혼 : 죽은 넋" 포스터

 

또한, 중국대륙의 공산화 전후 격동의 시간과 민중의 수난사는 문화대혁명 시절을 겪었던 장이모우의 <붉은 수수밭> 등의 연작을 통해 간접 체험할 수 있겠다. 영화제 등을 통해서만 제한적으로 접할 수 있지만, 현재 거의 마지막 남은 중국독립영화(“지하전영”이라 표현)계의 거장이라 할 왕빙의 작업들, 특히 50년대 대약진운동의 실패 전후 ‘反우파투쟁’과 ‘노동수용소’의 참상을 담은 500여 분 분량의 대작 <사령혼 : 죽은 넋> 등은 2차 대전 당시 홀로코스트 생존 유대인들의 증언 다큐 <쇼아>를 능가하는 역사적 공포와 상흔을 선사한다. 

그렇게 중국대륙은 굽이굽이 먼 길을 돌아서 덩샤오핑 이후 ‘흑묘백묘론’을 설파하며 개혁개방의 길로 들어선다. 그 이후의 중국 사회 변천은 현재 자타공인 최고의 중화권 거장 감독 중 한 명인 지아장커의 <스틸 라이프>를 비롯한 감독의 일련의 영화들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영화 "스틸 라이프" 포스터 이미지
▲ 영화 "스틸 라이프" 포스터

 

2.2 ‘단기 20세기’ 중국의 초상: 홍콩과 대만

대륙에서 밀려난 장제스 세력은 이른바 ‘국부천대’를 통해 대만으로 피난해 1990년대까지 계엄령을 유지하며 대륙과 체제경쟁을 벌였다. 제국주의 시대의 유산으로 영국의 식민지로 유지되던 홍콩은 중국과는 일정 부분 분화되는 별도의 정체성을 갖기 시작했다. 동아시아 금융과 무역의 허브가 된 서구화된 홍콩은 우리가 잘 아는 홍콩영화들을 만들어냈고, 그 역사는 굳이 여기에 언급할 필요가 없을 만치 잘 알려져 있다. 

다만 1997년 홍콩의 중국으로의 반환 전후로 홍콩영화계 인사들의 상당수가 싱가포르나 대만 등으로 이민을 가거나, 정반대의 영화 경향-주성치로 표상되는 코미디와 왕가위로 상징되는 불안의 정서로 양극화되던 흐름은 예민한 이들에 의해 쉽게 포착될 수 있었다. 

혼란한 정서 속에서 누군가는 현실을 잊기 위한 도박물과 형사ㆍ조폭물, 슬랩스틱 코미디에 열광했고, 그런 정서를 예술적인 표현으로 만나고 싶은 이들은 <중경삼림>과 <아비정전>, <동사서독> 같은 작품들에 열광했다.

 

영화 "중경삼림" 포스터 이미지
▲ 영화 "중경삼림" 포스터

그렇게 중국으로 반환된 홍콩은 2014년 우산혁명과 2019년 범죄인 인도 반대시위에 이르는 혼란한 이행으로 사반세기를 경유하고 있다. 50년간 홍콩의 현 자치체제를 존중하는 ‘일국양제’를 조약으로 보장했지만, 중국 본토 경제성장 초반의 창구 기능에서 점차 대륙에 종속되고 위상이 축소되어 가는 홍콩 사회의 불안은 영화계에서도 나타난다. 영화인력의 중국대륙 및 해외유출과 표현의 자유 관련 저우룬파(주윤발) 같은 유명배우와 본토 정부와의 갈등 등으로 그 단면을 확인할 수 있다.

영화 "비정성시" 포스터 이미지
▲ 영화 "비정성시" 포스터

대만은 우리 남북 대립의 유사판인 양안 분쟁의 굴곡을 거치면서 국민당 일당독재의 시간이 무척 길었다. 거장 허우샤오시엔의 <비정성시>는 1987년까지 계엄령 치하를 보냈던 억압된 대만 사회를 한 가족의 수난사를 통해 은유하고 있다.

또한, 대륙이 사회주의 블록으로 냉전 구도에 묶여있을 때 상대적으로 가까웠던 홍콩과 함께 무협 영화 등의 합작이 활발했었지만, 이후 블랙홀처럼 흡입력을 발휘한 대륙 시장에 인력과 영화산업 구조가 종속되고 자국 내수시장이 무너지면서 부침을 겪는다.

그 와중에도 양덕창, 차이밍량, 이안 등의 예술영화 거장들이 활약해왔지만 탄탄한 기반을 만들지 못한 채 표류 중이다. 마치 대만의 현 지형처럼.

 

3. 대륙의 ‘공식 역사물’들

가로막혀 있던 죽의 장막은 덩샤오핑 집권 후 개혁개방 붐과 함께 열리기 시작했다. 멀게는 아편전쟁 이후, 가깝게는 문화대혁명 이후의 지난 세월을 만회하려는 듯 대륙의 용트림은 가공할 위세를 과시했다.

하지만 1989년 천안문 사태로부터 촉발되는 국제사회의 우려도 함께 시작되었다. 중국은 비슷한 시기에 스스로 무너진 구소련과는 다르게 공산당 일당독재 지도체제를 유지하며 경제는 최대한, 정치는 최소한 열자는 태도를 취했다. 개혁개방 초창기에는 내부적으로 많은 시행착오와 혼란이 있었고, 천안문 사태의 최종결정권자였던 덩샤오핑은 경직화되기 시작한 공산당 내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남순강화’ 열차에 몸을 실어 대륙횡단을 해야만 했다. 그렇게 진통을 겪으며 중국은 세계에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천안문 사태를 고찰할 영상자료는 드물다. <태평천국의 문> 다큐멘터리는 아마 이후로도 계속 당시 상황을 파악하는데 거의 몇 안 되는 대중적 공개작품이 되지 않을까 싶다.

 

영화 "태평천국의 문" 포스터 이미지
▲ 영화 "태평천국의 문" 포스터 이미지

한동안 ‘메이드 인 차이나’는 세계자본주의 체제에 저임금 생산 공장으로 편입된 중국과 그 생산품의 조악함에 대한 비하의 대명사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수천 년의 역사와 거대한 인적자원, 그리고 대국의 조건은 어마어마한 결실을 낳았다. 개혁개방 이후 불과 30년도 채 안 되어 중국은 “G2”로 불릴 정도로 자본주의 체제 정착 후 국가 규모로는 최고속도로 급성장을 이룩해냈다. 14억 인구와 높은 교육열, 국가 주도의 자원 배분과 투자 등이 어우러진 결과이다. 중국은 100여 년간 잃었던 국가적 자부심을 회복하기 위해 사회주의가 유명무실해진 시점에서 권위주의 국가로 정체성을 전환하고 있다.(중국의 국가체제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영화 "건국대업" 포스터 이미지
▲ 영화 "건국대업" 포스터 이미지

강대국으로 ‘굴기’하려는 중국대륙의 욕망은 2000년대 들어 홍콩 등의 전문인력을 흡수하고 국가 차원의 지원을 통해 만들어지는 일종의 ‘역사 굴기’ 연작들에서도 나타난다. 

이를테면, 중국 정부의 대륙제패 과정을 다큐 드라마 형식으로 제작한 <건국대업>, 중국공산당의 고난의 출발시기를 재현한 <건당위업>, 중국공산당의 ‘항일투쟁’을 홍보하는 <백단대전>, 인민해방군의 초창기를 영웅서사로 만든 <호남성 전투ㆍ건군대업> 같은 ‘공식 역사물’이다.

그런 일련의 ‘관제영화’ 행보는 이제 미국을 대신해 우주 탐험과 세계경찰 역할을 자임하는 <유랑지구> 같은 상업영화 붐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영화 "건당위업" 포스터 이미지
▲ 영화 "건당위업" 포스터 이미지

 

4. 초강대국 중국에 대한 우려와 불안

새롭게 부활한 ‘신 중국’은 전통의 중화와 서구화의 혼종처럼 보인다. 어쩌면 먼 길을 돌고 돌아서 19세기 후반, 일본이 빠른 개방 후 아시아주의로 주변국과 상호 근린의 길을 가지 않고, ‘탈아입구’, 아시아를 버리고 서구화를 도모한 뒤 그 결과로서의 제국주의 패권을 추구했던 것과 얼개가 비슷한 느낌이 종종 든다.

서구열강에 뒤처져 있다는 초조감과 함께 부강한 국가적 권위에 대한 다수 국민의 옹호와 지지는 강력한 국가주의 결집에는 도움이 되고 있지만(경쟁상대인 미국의 입장과는 다른 측면에서) 주변국들에는 새로운 위협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얼마 전 끝난 G20 정상회담에서도-아직은 힘이 조금 부쳐 보이지만-20세기 중반 이후 ‘초강대국’으로 유지되는 미국과 무역전쟁은 물론, 군사ㆍ우주ㆍ첨단ㆍ문화산업 전반에서 맞대결을 벌일 수 있는 중국의 위력은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하지만 ‘중화제국’의 자존심과 서구화가 어우러진 기이한 21세기 ‘신 중국’은 우리는 물론 세계인들에게 수수께끼처럼 모호하고 불안한 모습이다.

넷플릭스에서 관람 가능한 <와인을 향한 열정> 다큐멘터리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되살아난 ‘용’은 세계 경제의 후발주자로 맹추격 중이다. 유서 깊은 프랑스의 자존심, 보르도 고급 와인을 투자용으로 사재기함은 물론 중국 자체생산을 시도해 수백 년 와인 역사를 재편하려는 노력은 보는 이에 따라 ‘음모론’을 연상케 할 정도이다. (산업과 문화예술 모든 분야에서 이런 경향은 심화되고 있다.)

중국은 ‘일대일로’ 정책을 펼치며 ‘차이나프리카’라는 신조어를 만들 정도로, 미국에 대항해 자국 중심으로 재편된 세계질서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런 새로운 초강대국의 탄생을 우리는 바로 곁에서 목도하고 있다.

 

영화 "와인을 향한 열정" 포스터 이미지
▲ 영화 "와인을 향한 열정" 포스터

21세기 중국의 강대국으로 부활을 바라보는 입장차이는 매우 크다. 과거역사에 대한 해석 관점에 따라서, 혹은 필요에 의해 과거역사를 재구성하는 방식에 따라 그 입장차이는 극명하게 갈라진다.

누군가는 ‘제국주의 패권 국가’ 미국에 맞서는 다극화 체제의 대항마로, 다른 누군가는 세계경찰로서 최소한의 양식을 갖추지 못한 신흥 패권국의 욕망으로 중국을 이해하고 바라본다. 옆집의 포악한 이웃으로 대할지, 예의만 갖추면 보살핌도 따라오는 너그러운 이웃으로 대해야 할지 인접한 우리들의 불안한 고민은 계속된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중국에 대한 시각이 다양하게 분화되고 취급되는 풍경들, 중화권에서 제작되는 근래 다양한 영화 경향의 공통점들을 살펴보는 것 또한 단순한 영화 감상을 넘어 앞으로도 상당 기간 계속될 정치ㆍ사회ㆍ문화적 토론에 풍부한 이해를 더해 주리라 믿는다.

 

영화 "유랑지구" 포스터 이미지
▲ 영화 "유랑지구"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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